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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산선문 2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9.06.05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714
내용
直指人心 見性成佛 不立文字 敎外別傳
(직지인심 견성성불 불입문자 교외별전)

이들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아, 중생이 본래 지니고 있는 불성에 눈떠, 대립과 부정을 상징하는 문자를 뛰어넘어 초월의 세계로 지향하여, 번쇄한 교리를 일삼은 교종(敎宗) 종파들이 소홀히 다루어 온 부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본래 의미를 따로 전한다는 4구표방(四句標榜)으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정리한다. 4구가 처음부터 함께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시간면에서 따져보아 교외별전을 제외한 3구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종에 관한 논의에 그대로 다루어서 무방하다.

9세기 중엽을 넘어서면서 9산선문이 집중적으로 세워지자, 교종에 대비되는 선종의 정체에 질문이 시작된다. 선종의 극성과 함께 대두한 선교(禪敎)의 우열에 관한 판단이 그것이다. 당시 선사(禪師)들은 선교간 상호위치 정립에서 대립의 관계보다 양립의 관계를 선택했다. 예컨대 9산선문으로 정착해 가던 9세기 후반의 선종승려들이 교종과 일정한 동반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그렇거니와, 선종이 정착되기 이전의 9세기 전반에는 화엄종의 대표적 3대사찰이 교선일치의 성향에 입각하여 선종을 수용한 것이 그 증거이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논의할 성격의 것이 아니지만,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선종 입론의 근거가 그때까지는 아직 교종에 의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이 시기 선승(禪僧)들을 대표하는 낭혜무염(郎慧無染)이 선교의 시시비비를 내치는 구절도 그렇거니와, 다른 선사들에게서도 보이는 것처럼, 선을 교의 상징들과 동격으로 병렬하면서 그것조차 뛰어넘고자 한 불립문자적 세계관이 바로 그 점을 웅변하고 있다. 이 두 측면의 결합, 하나는 선종의 입론이 불가피하게 교종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 한계성과, 하나는 교종과 조화를 이루되 그것을 포함하여 뛰어넘는 자기초월적 관점에 기초했다는 세계관이, 신라 말 고려 초에 선사들이 선교의 상호위치 정립이라는 이념적 과제를 선교대립보다는 선교양립적 방법으로 해결하게끔 한 것이다. 가령 교종부정 또는 교종대립의 한 표방으로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 나타나는 신라 선종 조사(祖師)들과의 관련내용은 1290년대 천책(天])이 정리한 선종우위의 특색을 반영한 설화 모음의 한 부분일 뿐이다.

960년 무렵 혜거(慧炬)에서 추상적으로 나타나서, 바로 뒷 세대인 1000년 무렵 영준이 구체화해 나간 소극적 선 우위의 사유자세는 뒤 시대에 정립된 교외별전이라는 적극적 선 우위의 사고체계를 이끌어냈다. 신라 말 고려 초의 법맥승계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사문 안에서의 자유로운 교류, 다른 가르침이나 다른 스승의 허용, 자칫 스승이나 시간 위주의 보수적으로 경색되기 쉬운 사제간의 관계설정이, 배우는 이 자신에게 달려 있을 만큼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 말 해룡왕사(海龍王寺)의 개산조인 보요선사(普耀禪師), 《조당집(祖堂集)》에서 높이 평가한 오관산 서운사 순지화상, 최치원이 높이 평가한 쌍계사 진감혜명은, 그들의 후예가 번성하지 못함으로써 9산선문의 계보에서 제외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 점에서는 활동한 시기와 제자들에 의한 활약, 이 두 가지가 9산선문의 성립요건으로 작용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즉 왕건에 의한 후삼국통일 이전 시기에 국사와 왕사의 지위에 오르거나 이에 비견될 예우를 받은 이들이 산문을 열고, 그 후예들 가운데 뛰어난 승려들이 계속하여 배출된 곳은 역시 9산선문 밖에 찾아볼 수 없다.

절과 산문을 동일한 대상물로 파악하지 않고, 한 절이 산문으로 불린 이래의 산문이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일정한 계통의 흐름이 계속하여 이어진 곳을 말한다는 원칙에 합의한다면, 신라 말 고려 초의 불교계를 주도한 선승들 대부분은 수미산문을 제외한 나머지 9산선문의 계보 안에서 활동한 존재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조심스럽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당대의 선종을 총망라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대표한 것은 9산선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비약하여 말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고려시대의 선종과 신라 말 고려 초의 9산선문이란 용어의 차이는 의식하건 않건 간에, 지역분포, 국가와의 관계, 선 수행의 내용, 각 산문과의 관계 등에서, 두 시대 간의 선종에 차별성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용어로 쓰여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9산선문의 성립은 신라 하대에 이르러 이전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장한 지방민의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며, 비록 특정한 신분집단이나 개인의 지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세력 일변도의 지지 속에서 선종의 기반이 세워지지 않았음이 주목된다. 그러나 농민전쟁기를 고비로 호족과 선사들의 밀착관계가 형성되고, 후삼국 쟁패가 치열한 지역에서는 세력권의 변화에 따라, 연고지의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꾀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농민전쟁 발발 이전에 혁명적으로까지 보이던 선종이, 사실상 양심적인 개인의 지성만으로 만족하는 진보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였음을 반증한다. 이는 선종의 관념성이 지닌 현실인식의 한계가 농민전쟁 이후의 농민군에게 물리적 압박을 받으면서 점차 지배계급에게로 기울 수밖에 없던 점에서 잘 나타난다. 결국, 무논리의 주관적 사유세계를 강조한 선종은 다소 진보적인 사회성을 띠기는 했지만, 이전의 화엄종의 대안으로 등장한 신라 말 고려 초의 주요한 이념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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