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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대사(達磨大師)가 중국에 전한 뒤 혜능(惠能)·신수(神秀) 등에 의하여 널리 보급되었다. 중국의 선종을 처음 신라에 전한 사람은 법랑(法朗)이었다. 그는 당(唐)나라에 유학했다가 선덕왕·진덕왕 무렵에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선종 4조인 도신(道信)의 법을 이은 그가 신라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전쟁기의 신라에서 그의 사상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호거산에 은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제자로서 당에 유학하여 북종선(北宗禪)을 계승한 신행(神行)과 그 제자인 삼륜선사(三輪禪師)에 의해 선법이 중앙에 알려졌다. 특히 삼륜은 헌덕왕비 귀승(貴勝) 부인의 도움으로 810년대에 단속사(斷俗寺)를 증축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그 제자들의 활동이 뚜렷하지 않다가, 신행·준범(遵範)·혜은(慧隱)을 거쳐 도헌(道憲)에 이르러 문경에 봉암사(鳳巖寺)를 지어 선풍을 크게 떨쳤는데, 이를 희양산파(曦陽山派)라고 칭한다. 그러나 그의 손제자(孫弟子)인 긍양(兢讓)에 이르러 법계를 바꾸었다. 즉 남종선 위주의 당시 불교계 분위기로 인해 남종선을 받아온 쌍계사 혜소(慧昭)를 도헌의 스승이라 일컫게 되었다. 최근에는 긍양이 법계를 바꾼 이유를 정치적 측면에서 찾아, 후백제 견훤의 후원을 받던 긍양이 견훤의 몰락 후 신라 왕실과 친분을 유지하던 계파임을 밝혀 고려 왕실의 신용을 얻을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희양산파와는 달리 그밖의 8개 선문은 남종선을 수용했다. 그 시작은 도의(道義)와 홍척(洪陟)이 821년과 826년 각각 중국에서 귀국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도의는 신라 불교계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해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했고, 후일 염거(廉居)를 거쳐 체징(體澄)에 이르러 가지산에 보림사(寶林寺)를 세워 선풍을 떨쳐 가지산파(迦智山派)를 이루었다. 한편 홍척은 지리산에 실상사를 세워 흥덕왕과 선강(宣康) 태자의 귀의를 받았으며, 신라 최초의 산문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창한 후 제자 수철(秀澈)이 계승했다. 혜철(惠徹)도 839년 귀국하여 태안사(太安寺 : 전남 곡성)를 중심으로 동리산문(桐裏山門)을 개창했는데, 도선(道詵)-경보(慶甫)-여(如)-윤다(允多)에게 계승되었다. 한편 무염(無染)은 845년 귀국하여 성주사(聖住寺 : 충남 보령)를 중심으로 제자를 양성했다. 그들을 성주산파라 칭하는데, 대통(大通)·여엄(麗嚴) 등에게 계승되었다. 현욱(玄昱)은 839년 귀국하여 혜목산(경기 여주) 고달사(高達寺)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그중 심희(審希)가 봉림사(鳳林寺 : 경남 창원)를 세우고 선법을 전했으므로 봉림산파라 칭하며, 찬유(璨幽) 등에게 이어졌다. 도윤(道允)과 범일(梵日)은 847년 귀국하여 선법을 전했다. 도윤의 제자인 절중(折中)은 사자산 흥녕사(興寧寺 : 강원 영월)에 머물며 제자를 양성했으므로 사자산파(師子山派)라 칭한다. 그리고 범일은 굴산사(崛山寺 : 강원 강릉)에 머물렀는데, 제자 개청(開淸) 때에 이르러 사굴산파를 형성했다. 가장 늦게 성립한 산문은 수미산문(須彌山門)으로, 911년 귀국한 이엄(利嚴)이 고려 태조의 귀의를 받아 932년 수미산 광조사(廣照寺 : 황해 해주)에 머물며 법을 전했다. 그밖에도 범패를 전한 쌍계사 혜소와 중국 위앙종의 선풍을 전한 순지(順之) 등도 있었지만, 뚜렷한 산문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선사들이 중국에 유학하여 선종을 수용했던 것은 신라 하대(下代)의 교학불교(敎學佛敎)가 훈고학적 성격을 띠게 되고, 신앙이 의례화한 데 대해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귀국하여 교종의 기성 사상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각 개인이 사색하여 진리를 깨달을 것을 권유했다. 선사들의 신분은 주로 진골이었다가 낙향한 귀족, 지방에서 새로 대두한 호족, 가난한 생선장수 출신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호족 및 6두품 등 소지식인계층과 왕실의 후원 아래 선문9산이 전국 각지에 성립함으로써 지방문화가 활성화되었으며, 소율희(蘇律熙 : 또는 金律熙) 등이 활동하던 김해지방은 선종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선문9산의 개창지들은 북종선을 전했던 희양산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선풍인 홍주종(洪州宗)을 전해왔다. 이는 홍주종이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을 바탕으로 했으므로, 선사들이 유학하기 전 신라에서 화엄종의 성기사상(性起思想)과 가깝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곧 일상생활 모두가 그대로 진리·불법(佛法)이라는 입각점에 서 있기 때문에 쉽게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신라말 고려초의 선종을 9산이라고 칭하는 데 대한 비판도 있다. 첫째, 승정(僧政)이 일원화되어 있던 신라에서는 종파가 발전하지 못했으므로, 선종의 경우에도 선문9산이라는 용어는 부적당하다는 것이다. 둘째, 고달원(高達院)·도봉원(道峰院) 등도 신라말부터 고려초까지 세력이 유지되고 법계(法系)가 계승되었지만 9산문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고달원과 도봉원은 고려 중기에 천태종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9산문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9산문의 용어는 천태종이 성립한 12세기 이후에 성립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므로, 나말여초의 9산문은 오히려 선종과 조계종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희양산파와는 달리 그밖의 8개 선문은 남종선을 수용했다. 그 시작은 도의(道義)와 홍척(洪陟)이 821년과 826년 각각 중국에서 귀국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도의는 신라 불교계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해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했고, 후일 염거(廉居)를 거쳐 체징(體澄)에 이르러 가지산에 보림사(寶林寺)를 세워 선풍을 떨쳐 가지산파(迦智山派)를 이루었다. 한편 홍척은 지리산에 실상사를 세워 흥덕왕과 선강(宣康) 태자의 귀의를 받았으며, 신라 최초의 산문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창한 후 제자 수철(秀澈)이 계승했다. 혜철(惠徹)도 839년 귀국하여 태안사(太安寺 : 전남 곡성)를 중심으로 동리산문(桐裏山門)을 개창했는데, 도선(道詵)-경보(慶甫)-여(如)-윤다(允多)에게 계승되었다. 한편 무염(無染)은 845년 귀국하여 성주사(聖住寺 : 충남 보령)를 중심으로 제자를 양성했다. 그들을 성주산파라 칭하는데, 대통(大通)·여엄(麗嚴) 등에게 계승되었다. 현욱(玄昱)은 839년 귀국하여 혜목산(경기 여주) 고달사(高達寺)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그중 심희(審希)가 봉림사(鳳林寺 : 경남 창원)를 세우고 선법을 전했으므로 봉림산파라 칭하며, 찬유(璨幽) 등에게 이어졌다. 도윤(道允)과 범일(梵日)은 847년 귀국하여 선법을 전했다. 도윤의 제자인 절중(折中)은 사자산 흥녕사(興寧寺 : 강원 영월)에 머물며 제자를 양성했으므로 사자산파(師子山派)라 칭한다. 그리고 범일은 굴산사(崛山寺 : 강원 강릉)에 머물렀는데, 제자 개청(開淸) 때에 이르러 사굴산파를 형성했다. 가장 늦게 성립한 산문은 수미산문(須彌山門)으로, 911년 귀국한 이엄(利嚴)이 고려 태조의 귀의를 받아 932년 수미산 광조사(廣照寺 : 황해 해주)에 머물며 법을 전했다. 그밖에도 범패를 전한 쌍계사 혜소와 중국 위앙종의 선풍을 전한 순지(順之) 등도 있었지만, 뚜렷한 산문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선사들이 중국에 유학하여 선종을 수용했던 것은 신라 하대(下代)의 교학불교(敎學佛敎)가 훈고학적 성격을 띠게 되고, 신앙이 의례화한 데 대해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귀국하여 교종의 기성 사상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각 개인이 사색하여 진리를 깨달을 것을 권유했다. 선사들의 신분은 주로 진골이었다가 낙향한 귀족, 지방에서 새로 대두한 호족, 가난한 생선장수 출신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호족 및 6두품 등 소지식인계층과 왕실의 후원 아래 선문9산이 전국 각지에 성립함으로써 지방문화가 활성화되었으며, 소율희(蘇律熙 : 또는 金律熙) 등이 활동하던 김해지방은 선종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선문9산의 개창지들은 북종선을 전했던 희양산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선풍인 홍주종(洪州宗)을 전해왔다. 이는 홍주종이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을 바탕으로 했으므로, 선사들이 유학하기 전 신라에서 화엄종의 성기사상(性起思想)과 가깝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곧 일상생활 모두가 그대로 진리·불법(佛法)이라는 입각점에 서 있기 때문에 쉽게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신라말 고려초의 선종을 9산이라고 칭하는 데 대한 비판도 있다. 첫째, 승정(僧政)이 일원화되어 있던 신라에서는 종파가 발전하지 못했으므로, 선종의 경우에도 선문9산이라는 용어는 부적당하다는 것이다. 둘째, 고달원(高達院)·도봉원(道峰院) 등도 신라말부터 고려초까지 세력이 유지되고 법계(法系)가 계승되었지만 9산문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고달원과 도봉원은 고려 중기에 천태종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9산문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9산문의 용어는 천태종이 성립한 12세기 이후에 성립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므로, 나말여초의 9산문은 오히려 선종과 조계종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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