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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쉬운 불교상식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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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4065
내용
1. 불교(佛敎)

불교(佛敎)를 문자 그대로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뜻이 됩니다. 부처님이란 말은 원래(原來) 인도말(梵語)의 부다(Buddha)인데, 중국(中國)에서 한자(漢字)로 불타(佛陀)라고 옮겨 쓴 것을 한국(韓國)말로 ?불(佛)?이란 글자의 뜻대로 말함입니다. 부처님은 일체(一切) 생명(生命)의 근원(根源)이며 일체존재(一切存在)의 참모습을 깨달으신 분을 의미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우주(宇宙)?인생(人生)의 참된 이치(理致)를 깨달으신 부처님의 법(法)을 말합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은 이러한 이치를 인류(人類)의 역사상(歷史上) 최초(最初)로 깨달신 분입니다. 따라서, 불교(佛敎)란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서 남겨진 법을 신앙(信仰)의 대상(對象)으로하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의 깨달음을 변해가는 시간 및 공간속에서 그때 그때의 표현방식에 따라 그 가르침을 믿고, 배우고, 따르고, 깨우치기 위한 종교입니다.







2. 법(法)

우주(宇宙)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무정물(無情物)과 유정물(有情物), 그리고 모든 현상(現象)들이 법(法) 아님이 없습니다. 법(法)이라 하면 영원(永遠)히 멸(滅)하지도 않으며 변(變)하지도 않는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원라(原理)인 인(因)과 연(緣)의 원리(인연법(因緣法), 연기법(緣起法)이라고도 함)를 의미합니다. 즉,일체존재(一切存在)와 일체생명(一切生命)의 근원(根源)된 진리(眞理)이며, 더 이상의 위없고 함이 없는 진리를 법(法)이라 합니다.







3. 법문(法門)

부처님의 진리자체(眞理自體)에 대한 말씀, 혹은 진리로 한 걸음씩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 자신이 가진 성품(性品)과 우리가 처(處)한 현재(現在)의 입장(立場) 및 생활환경(生活環境)에 따라 배우고 수행(修行)하며 닦아가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 있으니, 이를 법문(法門)이라 합니다. 그래서 불자(佛者)들은 불보살(佛菩薩)님, 경전(經典), 역대조사(歷代祖師) 스님들의 말씀, 또는 성인(聖人)들로부터 법문을 듣고 받아지녀, 믿고 배우고 닦아 진리에 입문(入門)하게 되며 나아가 자기진면목(自己眞面目)을 깨닫게 되어 참된 자아(自我)를 완성(完成)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범부중생(凡夫衆生)들의 성품(性品), 생각, 미혹(迷惑)한 상태(狀態)등이 천차만별(千差萬別)이므로, 병(病)에 따라 약(藥)을 달리 하듯이 부처님의 법문도 각 중생(衆生)의 근기(根氣)에 따라 여러가지의 법문이 있게 된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수많은 법문들도 많은 중생들이 필경(畢竟)에는 자기본성(自己本性)을 깨달아(참된 나(참 자아(自我), 진아(眞我)) 자유자재(自由自在)와 청정(淸淨)을 누리며 모두와 함께 참된 삶의 보람을 이룩하도록 해주는 길을 제시(提示)하고 있습니다.







4. 삼법인(三法印)

삼법인(三法印)이란 불교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근본교리(根本敎理)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가지 법인(法印)을 말합니다. 법인은 부처님께서 중생이 그릇된 견해에 빠지지 않도록 인간과 사물의 실상(實相), 즉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 세가지로 보여주셨기 때문에 마치 진리의 인장(印章)과 같다고 해서 법인이라고 합니다. 이상의 이 세가지에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더하여 사법인(四法印)이라고도 하며, 열반적정 대신에 일체개고를 넣어 삼법인을 삼기도 합니다.




◎ 제행무상(諸行無常)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현상적(現象的)인 것은 형상(形象)이 있는 것이거나 없는 것이거나 끊임없이 생멸(生滅)하고 변화하여 항상(恒常)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성장하고 늙어서 마침내는 병들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생각, 그리고 마음 또한 끊임없이 변합니다. 세상의 어떠한 물건도 생기게 되면 어느정도 머물다가 결국에는 허물어지게 됩니다. 이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은 중생들로 하여금 존재하는 모든 것 자체를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는 그릇된 견해를 버리게 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과 창조의 원리를 일깨워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시간적(時間的)인 무상(無常)을 나타낸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면 제법무아(諸法無我)는 공간적(空間的) 무상(無常)을 밝힌 것입니다. 이는 고정된 실제의 몸이 없다는 존재론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因緣)이라고 하는 상관관계적(相關關係的)인 법칙(法則)에 의하여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나(자아(自我))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음을 말합니다. 이 가르침은 나, 혹은 내것이라는 집착(執着)과 고정관념(固定觀念)을 부정함으로써 더 큰 인생관(人生觀)과 세계관(世界觀)을 갖게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 열반적정(涅槃寂靜)

모든 번뇌(煩惱)가 소멸된 자리를 열반(涅槃)이라 하며, 이는 일체의 대립(對立)이 끊어지고 모순(矛盾)을 초월하여 고요하고 원만(圓滿)하며 청정(淸靜)하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현상에 대한 집착(執着)과 망상(妄想)만 없애면, 영원한 생명을 깨달아서 나고 죽는 윤회(輪回)의 고통에서 벗어난 대자유(大自由)의 상태(부처님의 상태)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어리석은(미망(迷妄))은 자기의 주관(主觀)이나 객관(客觀)을 절대시하는 고정관념(固定觀念)에서 비롯되며, 이로부터 애착(愛着)이생기게 되고, 애착은 괴로움(고(苦))을 낳게 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주관도 객관도 모두 무상(無常)이며, 무아(無我)라는 사실을 통찰하여 분명히 인식하고, 집착(執着)과 망상(妄想)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 열반적정(涅槃寂靜)은 모든 존재와 현상이 공허하여 얻을 수 없는 것이나, 깨달음의 진리세계는 영원하며 원만하며 불멸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 일체개고(一切皆苦)

시간적으로 무상(無常)하며 공간적으로도 무상한 실제의 몸(실체(實體))이 없는 우주의 삼라만상(森羅萬象)에 둘러싸인 인간의 현실이야 말로 괴로움이란 뜻입니다. 정신(精神)과 물질(物質), 즉 인간이 무상하며 인간이 사는 세계가 무상한 것입니다. 인간이 소유한 명예(名譽), 권력(權力), 부귀(富貴) 또한 무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것들에 대하여 상주불변(常主不變)의 인식(認識)을 가지고 나와 내것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며, 이로 인한 욕망(慾望)이 무상한 법(法)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을 괴로움으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즉, 무상(無常)을 무상(無常)으로 알지 못하고 영원(永遠)한 것으로 잘못 인식(認識)하는 소견(所見)에서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인생(人生)의 가치(價値)를 부정하는 염세주의적(厭世主義的)인 관념(觀念)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여 보다 향상된 삶을 이루도록 해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5. 사성제(四聖諦)

사성제(四聖諦)란 4가지의 성스런 진리를 말하며, 사제법(四諦法) 또는 사진제(四眞諦)라고도 합니다. 출가(出家) 이전에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의 관심사는 인간 현실의 괴로움, 즉, 생로병사(生老病死)에 대한 해결의 문제였습니다. 석가세존(釋迦世尊)께서는 부처님이 되신 후, 깨달으신 바 위없는 진리를 사성제(四聖諦)라는 명제에 대입시켜서 중생을 위하여 쉽게 말씀하여 주신 법문(法門)으로, 녹야원(綠野園)에서 5인의 수행자인 “카운디나”, “알폐”, “발데”, “십력가섭”, “마남구리”에게 설(說)하신 최초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 사성제(四聖諦)란 고성제(苦聖諦), 집성제(集聖諦), 멸성제(滅聖諦), 도성제(道聖諦)를 말하며, 인간현실의 괴로움을 규명하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 논리적이고도 실천적인 가르침입니다. 즉, 괴로움이란 무엇이고, 그 원인은 무엇이며, 괴로움이 없는 이상적인 상태란 어떤것이며, 그 이상에 이르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4단계로 나누어 설하신 법문(法門)입니다.




◎ 고성제(苦聖諦)

“미혹(迷惑)으로 둘러싸인 이 세간(世間)은 괴로움(고(苦))이다.” 하는 것이니 이것을 고성제(苦聖諦)라 합니다. 아함경(阿含經)의 전법륜품(轉法輪品)에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을 이렇게 설하고 계십니다.

“무엇이 괴로움이냐 하면, 태어남의 괴로움(생고(生苦)), 늙음의 괴로움(노고(老苦)), 병의 괴로움(병고(病苦)), 죽음의 괴로움(사고(死苦)), 근심과 슬픔과 번뇌(煩惱)의 괴로움(우비뇌고(憂悲惱苦)),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괴로움(애별리고(愛別離苦)), 원한(怨恨) 있는 이와 미운이를 만나는 괴로움(원증회고(怨憎會苦)), 구하려 하나 얻지 못하는 괴로움(구불득고(求不得苦)이니 총체적으로 말하면 ‘인생의 존재 모든 것이 괴로움(오음성고(五陰盛苦))’ 이니라.”

이러한 괴로움은 그 자체적인 것만으로도 괴로운 것이지만 부처님께서 설하신 괴로움의 의미는 단순한 괴로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존재(存在)에 대한 사색(思索)을 거친 괴로움인 것입니다. 괴로움이야말로 자기탐구(自己探究)와 이상탐구(理想探究)의 근본적인 동기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고뇌(苦惱)를 성스러운 진리라고 보는 부처님의 세계관(世界觀)과 인생관(人生觀), 이것이 바로 불교(佛敎)의 특성(特性)이며 독자성(獨自性)이기도 한것입니다.




◎집성제(集聖諦)

집성제(集聖諦)는 괴로움의 발생원인을 밝히는 성스런 진리로, 집(集)은 원인(原因), 기원(起源)을 뜻합니다. 상주불변(常住不變)의 인식을 가진 인간의 지나친 욕망(慾望)이 무상(無常)한 법(法)에 부응(副應)하지 못해서 괴로움이 나타나게 됨을 삼법인(三法印) 중의 하나인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말씀드리는 과정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즉 이것 저것 모두 소유하고 싶은 과도한 욕망에서 괴로움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같다고 해서 갈애(渴愛)라고 표현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지나친 욕망의 상태를 나타내는 갈애를 다음처럼 3가지로 구분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욕애(慾愛) : 자기 및 종족의 보존과 관계있는 성의 욕망, 즉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갈애

유애(有愛) : 존재의 갈애, 즉 개체의 생존을 추구하는 갈애

무유애(無有愛) : 유애와 반대되는 것으로 삶을 포기하려는 존재없음의 갈애,즉 삶의 번거로움, 혹은 생존경쟁에서 도태하여 나만 없어지면 하는 등의 생에 대한 의욕상실을 보이는 상태

인간은 이러한 욕망에 지나치게 탐착(貪着)함으로써 번뇌(煩惱)를 쌓게 되고, 이에 구속되어 부자연스런 삶을 살게되며 결국에는 죽은 후에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윤회(輪廻)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윤회의 원인을 업(業)이라 하며 업은 곧 지나친 욕망, 즉 갈애의 나타남인 것입니다. 집성제(集聖諦)는 욕망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나라 욕망의 지나침을 경계시키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멸성제(滅聖諦)

멸성제(滅聖諦)는 괴로움(苦)의 멸(滅)함을 나타내는 성스런 진리입니다. 즉, 괴로움을 극복하여 벗어난 상태로 지나친 욕망을 남김없이 멸함으로써 해탈(解脫)하여 집착이 없어진것을 말합니다. 불교의 이상인 열반(涅槃)이 곧 멸성제(滅聖諦) 입니다. 그러나 석존(釋尊)께서 남김없이 멸하라 하심은 욕망자체가 아닌 괴로움을 생기게 하는 갈애(渴愛) 즉, 지나친 욕망을 삼가함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나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법칙(緣起法則)의 관점에서 보면, 지나친 욕망으로 하여 괴로움이 생기므로, 욕망의 과도함을 버리면 자연히 괴로움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멸성제(滅聖諦)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나친 욕망의 포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 갈애를 다버리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에 대해 어느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를 제시하셨습니다. 중도에 관한 내용은 도성제(道聖諦)에서 보다 자세히 언급됩니다만, 중도의 길을 걸음으로써 욕망은 적절히 조절되고 괴로움이 없는 생활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멸성제(滅聖諦)는 고성제(苦聖諦), 집성제(集聖諦)를 통해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밝힘으로써, 괴로움은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가르침것입니다.




◎도성제(道聖諦)

도성제(道聖諦)는 괴로움(苦)의 멸(滅)함에 이르는 길을 밝힌 성스런 진리를 말합니다. 석가세존(釋迦世尊)께서는 지나친 갈애(渴愛)를 없애는 길, 적절히 이를 조절하여 열반(涅槃)에 이르는 방법을 8가지로 제시하셨습니다. 이 8가지를 팔정도(八正道)라고 하며, 8가지의 바른 길이란 뜻입니다. 바른길이란 “어떤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는 적절함”을 말하는 중도(中道)입니다.

정견(正見) : 편견(偏見)없이 바르게 보라는 것입니다. 일체의 존재(存在)와 사물(事物)을 바르게 관찰하고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삼법인(三法印)을 깨달아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입니다.

정사유(正思惟) : 탐욕스런 마음(탐심(貪心))과 성내는 마음(진심(嗔心)),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치심(恥心))을 씻어 버려서 이로부터 비롯되는 번뇌(煩惱)에 얽매이지 말고 바르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생각은 올바른 행동을 낳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어(正語) : 거짓말(망어(妄語)) 욕하는 말(악구(惡口)), 모략하는 말(양설(兩舌)), 그리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기어(奇語))을 삼가고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에 의하여 항상 바른 말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정업(正業) : 살생(殺生)과 도둑질(투도(偸盜)), 그리고 사음(邪淫)등의 악행(惡行)을 삼가고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에 의하여 항상 바른 말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정명(正命) : 도박(賭博), 사기(邪氣), 도둑질(투도(偸盜))등의 삿된 직업으로 생활하지 말고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衣食住)를 구하는 올바른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정정진(正精進) : 올바른 노력의 경주를 말합니다. 즉, 한결같이 꾸준하게 힘써 구하고 힘차게 나아가고 오로지 전념하여 버리지 아니하며, 지쳐서 물러섬이 없이 바르게 마음을 닦아가야 하겟습니다.

정념(正念) : 삿된 생각을 버리고 바른 마음으로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즉, 부질없는 욕망(慾望)과 사념(邪念)을 버리고 맑은 마음으로 수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정정(正定) : 몸과 마음의 바른 안정을 말합니다. 즉, 수행을 함에 있어서 어지럽지 않고 흩어짐이 없이 일심으로 몰두하라는 것입니다.

도성제(道聖諦)는 상호연관관계(相互聯關關係)를 갖는 8가지의 길(팔정도(八正道))를 통하여 괴로움을 멸(滅)하는 길을 밝힘으로써, 바른 인격을 도야하는 수행법을 제시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6. 삼보(三寶)

삼보(三寶)는 생사(生死)의 고해(苦海)를 건네주며, 윤회(輪回)의 어둠을 밝혀주는 중생(衆生)들의 영원한 귀의처(歸依處)인 3가지 최고의 보배라는 뜻으로서,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를 말합니다. 삼보는 모든 중생들의 귀의대상(歸依對象)임은 물론이거니와 예배(禮拜)와 공양(供養)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삼보에는 현전삼보(現前三寶), 주지삼보(住持三寶), 동체삼보(同體三寶)가 있으며, 이를 삼종삼보(三種三寶)라고 합니다.




◎ 불보(佛寶)

부처님(Buddha)를 뜻합니다. 즉, 역사상의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을 비롯하여 과거와 현재의 모든 부처님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일체생명(一切生命)의 근원이며 일체존재(一切存在)의 참모습을 깨달으신 분으로써, 스스로 진리를 깨닫고 다른 이들을 깨닫게 해주시는 실천행(實踐行)을 원만하게 갖추신 분입니다.



◎ 법보(法寶)

일체중생(一切衆生)들을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하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흔히 들어본 경(經), 율(律), 론(論)의 삼장(三藏)이 바로 이것입니다. 경장(更張)에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교리(敎理)가 담겨져 있으며, 금강경(金剛經)처럼 경(經)자를 붙이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율장(律藏)에는 불교도가 깨달음의 경지에 나아가기 위해 지켜야할 규율(規律)과 생활상의 금계(禁戒), 승단(僧團)의 규약(規約)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논장(論藏)은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신 후, 각 시대의 조사(祖師) 스님들께서 경장 및 율장에 담겨진 뜻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논술한 것으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처럼 끝에 론(論)자가 붙어 있습니다.




◎ 승보(僧寶)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정법(正法)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나아가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공동체로서, 중생들을 지도 및 교화 하는 모임인 승단(僧團)을 말합니다. 승(僧)이란 승가(僧伽)의 준말이며 산스크리트어의 상가(saingha)의 음을 옮긴 것입니다. 승가는 초기에 비구(比丘 : 출가하여 계행(戒行)이 구족한 남자승려(男子僧侶)), 비구니(比丘尼 : 출가하여 계행(戒行)이 구족한 여자승려(女子僧侶)), 사미(沙彌 : 출가하여 부처님의 법을 배우는 나이 어린 남자승려(男子僧侶)), 그리고 사미니(沙彌尼 : 출가하여 부처님의 법을 배우는 나이 어린 여자승려(女子僧侶))로 이루어졌으며, 후기에는 우바이(優婆夷 : 재가신도(여자))와 우바새(優婆塞 : 재가신도(남자))를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7. 삼종삼보(三種三寶)

삼종삼보(三種三寶)는 현전삼보(現前三寶), 주지삼보(住持三寶), 동체삼보(同體三寶)를 통털어 일컫는 말입니다.




◎ 현전삼보(現前三寶)

부처님 생존당시의 석가세존(釋迦世尊)과 그 가르침, 그리고 제자들인 비구(比丘)와 비구니(比丘尼)들을 말합니다.



◎ 주지삼보(住持三寶)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재료등을 이용하여 조성된 불상(佛像)이나 불화(佛畵)로서, 불자(拂子)들의 귀의(歸依)의 대상이되는 것을 불보(佛寶), 경판(經板)이나 종이등에 쓰여진 불교경전(佛敎經典)을 법보, 비구와 비구니 스님들을 승보(僧寶)라 합니다.




◎ 동체삼보(同體三寶)

우주본원(宇宙本源)의 이체(理體 : 이성(理性)으로서 포착되는 사유의 대상)에 갖추어진 삼보(三寶), 즉 본체론(本體論)적으로 삼보를 설명한 것입니다. 어려운 이야기처럼 들립니다만 불(佛), 법(法), 승(僧) 삼보가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닌 동체(同體)의 존재임을 뜻합니다.







8. 삼신(三身)

삼신(三身)이란 부처님의 몸(불신(佛身))을 셋으로 나눈 것으로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말합니다. 이 삼신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대표적인 불신관(佛身觀)이기도 합니다.




◎법신(法身)

우주의 본체인 진여실상(眞如實相)을 인격화한 영원불멸의 불신(佛身)을 말하며, 청정법신 비로자나불(淸淨法身 毘盧자那佛)로 표현합니다. 법신(法身)은 진리자체(眞理自體)의 몸으로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현실의 근본바탕이 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조화롭게 하는 주체로서, 항상 밝고도 맑으며 바른 마음이며 지혜롭고 자비로운 본래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불신(佛身)입니다.




◎보신(報身)

진리자체의 몸인 법신에 의지하여 발고 맑고 바른 마음을 인연으로하여 얻어진 부처님의 몸을 보신(報身)이라 하며, 원만보신 노사나불(圓滿報身 盧舍那佛)로 표현합니다.




◎화신(化身)

화신(化身)은 교화대상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습을 나타낸 불신으로 변화하는 몸을 말하며, 응신(應身), 또는 응화신(應化身)이라고도 합니다. 즉, 중생들의 마음가짐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내며, 특정한 시대와 지역과 상대에 따라 그 시댕의 중생들을 구하기 위해 출현하는 모든 부처님을 뜻합니다. 화신은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千百億化身 釋迦牟尼佛)로 표현하며, 역사상의 모든 부처님(과거칠불(過去七佛))은 모두 화신불에 해당됩니다.

삼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어느 월간지에 게재되었던 내용을 인용하기로 하겠습니다.

“천강유수 천강월(千江有水 千江月)이란 말처럼 일천강이 있으면 일천개의 달이 비춥니다. 그러나 물은 물이로되 달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물이 있습니다. 비가 와서 모래찌꺼기가 믾은 황톳물은 달이 비처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물도 모래찌꺼기가 차츰차츰 가라앉으면 즉 고요한 상태가 되면 달빛이 맑게 비춰집니다. 여기서 물은 보신이고 그림자는 화신입니다. 그리고 청산의 진짜 달 하나는 법신의 자리입니다. 물은 달이 비출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며, 인(因)을 비출 수 있는 것입니다.”







9. 십이처설(十二處說)

우리 인간에게는 시각/청각/미각/촉각/지각 기능을 발생시키는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意志(意)라고 하는 여섯 개의 인식기관이 있습니다. 이 여섯 개의 인식기관들을 가지고 우주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를 육근(六根)이라 하며 육입(六入), 또는 육처(六處)라고도 합니다.

육근(六根)의 대상이 되는 색(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 법(法)을 육경(六境)이라 하며, 육근을 가지고 육경을 인식하는 감각 및 지각의 주체(主體)를 육식(六識 :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이라 합니다. 육근(六根)과 육경(六經)이 만나 감각과 지각기능이 발생하게 되며, 육근과 육경, 그리고 육식이 만나 감각과 지각의 인식작용이 생기는 것입니다. 육경과 육근을 합하여 십이처(十二處)라 하며, 십이처에 육식을 더하여 십팔계(十八界)라 합니다.

십이처설(十二處說)은 우리 주변의 우주 삼라만상이 육근과 육경의 십이처에 모두 포함되며,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世界觀)이며 우주 삼라만상의 일체만유(一切萬有)에 대한 일종의 분류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교설이 제시하는 바 하나는 모든 존재를 인간의 인식을 중심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우주의 모든 것이 육경과 육근을 통하여 인식되며, 인간의 인식범위를 넘어선 초월적인 것들도 종교적 수행을 통해서도 끝내 인간에게 자증(自證)될 수 없다면 일단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또 하나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섯 개의 감각기관 즉, 육근은 그대로 인간의 존재를 나타내며, 인식의 대상인 육경은 인간의 환경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주체적 인간의 특질을 의지(意志)로 파악하고 객체적인 대상의 특질을 법(法)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의지란 자유와 능동적인 힘이 있음을 의미하며, 법이란 원인이 있으면, 그에 따른 결과를 나타내는 것들을 말합니다.







10. 사대오온

◎사대(四大)

일체존재(一切存在)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물질적 요소는 무엇일까요?. 이 문제는 동서고금을 통한 관심사였으며, 현재에도 원소물질(元素物質)에 대한 탐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불교가 일어날 무렵의 인도에서는 자연과 인간을 구성하는 궁극적인 물질적 요소를 지(地), 수(水), 화(化), 풍(風)의 4가지로 인정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4가지를 사대(四大)라고 하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이 사대요소설(四大要素說)을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지난호에 말씀드렸던 십이처(十二處) 가운데 다섯 개의 인식기관인 오근(五根 :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과 이들의 대상인 색(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의 오경(五境)은 각각 사대로 분석되며, 이러한 사대요소들이 결합된 것을 물질적인 형체를 나타내는 색(色)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온(五蘊)

오음(五陰)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의 온(蘊)이나 음(陰)은 ‘쌓임’, ‘모임’ 등을 의미하는데 원말은 근간(根幹)이란 뜻으로 ‘잡아함(雜阿含) 제 2권의 음경(陰經)’을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것을 근간(陰)이라 하는가?. 모든 색(色)으로서 과거나 미래나 현재나 안이나 밖이나 굵거나 가늘거나 좋거나 더럽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그 일체는 모두 색의 근간이라 한다. 수(受), 상(相), 행(行), 식(識)도 또한 그와 같아서 그 일체는 모두 수, 상, 행, 식의 근간이라 한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대(四大)의 적절한 화합으로 물질적인 형태를 이루는 색(色)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며, 여기에 정신을 구성하는 상(相), 행(行), 식(識)의 4가지를 합쳐 오온(五蘊)이라 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수(受)는 감수작용으로서 외부의 자극에 대한 어떤 감각이나 지각, 인상 등의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상(相)은 대상을 인식하게 하는 표상작용으로 수(受)를 통해 감수된 것을 색깔이나 모습 등으로 마음속에 표상하여 개념화함을 말합니다. 행(行)은 의지 및 그 밖의 정신작용으로 신체나 언어와 의식으로 나타나는 업(業)을 형성하며, 식(識)은 판단이나 추리에 의한 식별작용을 가리킵니다.

십이처가 일체존재를 포괄하는 하나의 분류법이라면 오온 또한 새로운 차원에서의 일체존재에 대한 분류법인 것입니다. 이는 인간존재 뿐만아니라 외계의 존재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십이처와 더불어 오온 또한 일체존재를 가리키는 술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1. 인과(因果)에 대하여

십이처설(十二處說), 사대오온설(四大五蘊說)을 통하여 일체존재(一切存在)에 대하여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세계를 관찰한 바 있습니다. 또한, 삼법인설(三法印說)을 통하여 일체존재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영구불변(永久不變)이 아닌 성주괴공(成住壞空),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것임을 보인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어떠한 규칙성이 없이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지만 무상한 것속에 상주하는 법칙(法則)들을 “고익진 선생님께서 지으신 불교의 체계적 이해” 내용을 요약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과율(因果律)

십이처설에서 여섯 개의 감각기관 즉, 육근(六根)은 그대로 인간의 존재를 나타내고, 인식의 대상인 육경(六境)은 인간의 환경에 해당되며, 주체적 인간의 특질을 의지(意志)로 파악하고 객체적인 대상의 특질을 법(法)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인 바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능동적 작용을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작용이 가해지면 대상은 그에 상응하는 필연적인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이는 인간과 인간 이외의 대상사이에는 물론 인간과 인간사이에도 성립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체적 인간과 객체적인 대상사이에는 인과(因果)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적 작용을 원인으로 하여 대상의 필연적 반응이 결과로 따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이러한 의지적 작용을 ‘업(業)’이라 하고, 이에 대한 객체적 대상의 필연적인 반응을 ‘보(報)’라고 합니다. 인과업보(因果業報)라든지 업인과보(業因果報)라는 성구는 이렇게 해서 성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 인연화합설(因緣化合說)

주체적 인간과 객체적인 대상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인과율(因果) 관계가 있으며, 일체존재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영구불변(永久不變)한 것이 아닌 성주괴공(成住壞空),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것임을 또한, 삼법인설(三法印說)을 통하여 보인 바 있습니다. 이러한 일체존재의 생멸변화에는 반드시 인연화합(因緣化合)의 원리가 수반되는 것입니다.

쌀을 가지고 밥을 짓는 경우를 예로 들고자 합니다. 쌀밥을 지으려면 먼저 여러가지 조건들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쌀을 단지나 어떤 장소에 그냥 두기만 한다면 밥이 되지를 않습니다. 밥을 짓기 위하여 밥솥에 쌀을 넣고 물을 부어 불을 지피는 등의 인위적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쌀이 없으면 쌀밥을 지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쌀밥을 지으려면 인위적인 작용을 나타내는 동력인(動力因)외에 쌀이라고 하는 질료인(質料因)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료인을 불교에서는 연(緣)이라고 합니다.

우주 삼라만상 일체존재의 생멸변화에는 이처럼 인(因)과 연(緣)의 두가지 조건이 반드시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두가지 조건의 갖추어짐을 인연화합(因緣化合)이라 합니다. 서구학자들은 ‘인’을 제 1차적 원인(Primary cause), ‘연’을 제 2차적 원인(Secondary Source)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인연화합설을 가지고 인간의 성패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아무리 노력해도 외연(外緣)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도 당사자의 자발적 노력이 없으면 성공 또한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우주 삼라만상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지만 무상한 것 속에는 일정한 법칙(法則)들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존재와 존재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과 이런 법칙들을 포괄하는 법주법계(法住法界)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이 외계에 어떤 의지적 작용을 가하면 외계는 그에 따른 반응을 나타냅니다. 이런 뜻에서 인간의 의지는 생멸변화의 근본원인으로서 그 절대성을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세계 속의 인간은 세계에 영향을 끼치지만 동시에 세계의 영향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연화합에 의하여 어떤 결과가 발생하게 되면, 그것은 그를 발생시킨 원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연화합의 결과가 단순히 결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원인(原因)과 연(緣)이 되어 다른 존재에 관여하게 되는 이런 관계를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라고 합니다. 모든 존재는 결과와 동시에 원인인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떠난 나는 있을 수 없으며, 거대한 천체로부터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서로 얽히어 우주의 신비롭고도 불가사의한 현상을 전개시키는 것이기에, 우리 이웃에게는 물론 어떤 미물이라도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대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 법주법계(法住法界)

주체적 인간과 객체적 대상사이에는 인과율(因果律)이 사물의 생멸변화(生滅變化)에는 인연화합(因緣化合)의 조건이, 존재와 존재사이에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멸(滅)해버린 것과 새로 발생한 것은 다같이 이러한 똑같은 법칙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무상 속에는 일정한 법칙이 상주하고 있어서 각 존재에 머무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법주(法住)라고 합니다. 또한 모든 존재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로 구성 되어 있듯이 모든 존재는 이러한 법칙을 요소로하여 성립해 있는 것입니다. 이를 법계(法界)라 합니다.







12. 연기(緣起)

연기(緣起)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因:원인)과 연(緣:조건)이 있어 일어난다”는 인연소기(因緣所起)의 준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고(苦)라고 하는 난제의 해답을 얻기 위하여 6년동안 고행을 쌓고 마침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으신 것이 이 연기법입니다. 이 연기법은 지난호에 말씀드렸던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뜻합니다. 즉,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관계되어서 존재하며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그 원인이 있기 때문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죽음의 원인은 태어남이라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이러한 이치에 따라 논리적으로 추구한 끝에 괴로움의 원인을 밝히고 그 원인을 없애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깨달으신 것입니다.

어떤 원인(原因)으로 연(緣)에 의하여 생기고 연이 다하면 멸(滅)해 버리는 이 법칙(法則)은 부처님의 출현과 무관하게 법으로 정해져 있던 것이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단지 이를 발견하셨을 뿐입니다. 이 법은 결코 변하지 아니하는 진리이며 현실의 모든 존재를 성립시키고 있는 법(規範)이기도 한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 연기법을 깨달음으로써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원리도 깨달으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연기 따라 생멸을 거듭하는 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로서의 “나(我)”라든가 “영원한 나의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법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이 십이연기(十二緣起) 입니다. 즉, 인생의 괴로움을 12갈래로 나누어 서로의 관계를 정형화(定型化)한 것으로서, 괴로움의 원인을 밝히고 단계적으로 고뇌가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한 것입니다.




◎ 십이연기(十二緣起)

연기법(緣起法)을 단계에 따라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이 십이연기(十二緣起) 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진리(眞理)에 대한 무지(無知)로 어리석으면 죽음의 괴로움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으로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12단계로 보인 것입니다.

십이연기의 최초단계는 무명(無明) 입니다. 인간의 고뇌는 무명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무명이란 실재(實在)하지 않는 무상(無常)한 것을 실체(實體)로 착각하여 영원한 것으로 집착해버리는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제법(諸法)의 실상(일체의 구조(十二處, 四大, 五蘊)과 속성(三法印), 연기의 법칙성.....)에 대하여 무지(無知)한 까닭에 인생의 고뇌와 불행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음단계는 행(行) 입니다. 행은 “결합하는 작용”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명을 연(緣)하여 행이 있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작용을 말합니다. 즉, 무명의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하며 생각함으로써 습관이나 성격, 소질 등의 자기(自己)가 형성되어, 이른바 업(業)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식(識) 입니다. 식은 “분별하는 인식작용”을 말합니다. 행에 의하여 형성된 잠재적인 힘을 가지고 육근(六根)을 통하여 받아들인 모든 인식을 판단하는 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과정인 것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명색(名色) 입니다. 명색은 식을 연하여 나타나게 되는데, 명(名)은 비물질적인 것을 색(色)은 물질적인 것을 말합니다. 오온설(五蘊說)로 보면 색온(色蘊)은 색에 수상행식온(受想行識蘊)은 명에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명색의 발생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로서 일체의 존재가 현상적으로 나타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육처(六處) 입니다. 명색이 있음으로 인하여 이를 지각하는 능력이 일어나게 됩니다. 지난번 십이처설(十二處說)에서 말씀드린 바 있는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意志(意)라고 하는 여섯 개의 인식기관인 육처(六處 : 육근(六根) 또는 육입(六入)이라 함)를 통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즉 인간의 시각기능, 청각기능, 취각기능, 미각기능, 감촉기능, 지각기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단계는 촉(觸) 입니다. 육처를 연하여 “촉”이 있게되는데 이는 ‘접촉한다, 충돌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감각기관인 육처(六處)와 그 대상인 육경(六境 : 色, 聲 香 味 觸 法)과 감각 및 지각의 주체가 되는 육식(六識 :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이 화합하는 현상입니다.

십이연기의 일곱 번째 단계는 수(受) 입니다. ‘수’는 감수작용(感受作用)을 의미하는데, 경전(아함경(阿含經))을 보면 ‘촉’에 의하여 괴로움(苦), 즐거움(樂), 그리고 괴로운 것도 아니고 즐거운 것도 아닌 것(不苦不樂)의 세 가지 종류를 들고 있습니다. 이는 접촉에 따른 필연적인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단계는 애(愛) 입니다. ‘애’는 갈애(渴愛)를 말하는 것으로 지난번 사성제(四聖諦)중의 하나인 집성제(集聖諦)를 말씀드리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즉, 갈애란 목마른 사람이 물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같은 지나친 욕망을 말하며,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갈애인 욕애(慾愛), 개체의 생존을 추구하는 갈애인 유애(有愛), 유애와 반대되는 것으로 삶을 포기하려는 존재 없음의 갈애인 무유애(無有愛) 세 가지를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무명’이 지혜를 가로막는 장애라 하면 ‘애’는 바로 번뇌를 쌓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즉, 욕망에 지나치게 탐착함으로써 번뇌를 쌓게 되고, 이에 구속된 삶을 살게되며 결국에는 죽은 후에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윤회(輪廻)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아홉 번째 단계는 취(取) 입니다. ‘취’는 갈애에 의하여 추구된 대상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몸과 말로써 짓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릇된 소유의 마음을 가지고 몸과 언어로 업(業)을 짓게 됩니다.

열 번째 단계는 유(有) 입니다. ‘유’는 몸과 말로 짓는 행동인 ‘취’에 의한 결과로 “있음”을 나타냅니다. 경전에는 세 가지의 ‘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욕망이 있는 욕계(慾界), 욕망은 없으나 물질이 남아있는 색계(色界), 욕망과 물질이 모두 없으나 정신적인 것이 남아있는 무색계(無色界)가 그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사(生死)의 테두리를 못 벗어난다고 하는 삼계(三界)인 것입니다.

열한 번째 단계는 생(生) 입니다. ‘생’은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으로 ‘유’로 인한 필연적 결과입니다. 즉, 생사(生死)하는 존재 자체가 형성되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노사(老死) 입니다. ‘노사’는 ‘생’으로 말미암은 늙음과 죽음을 말합니다. 생사에서 비롯되는 근심(優), 슬픔(悲), 번뇌(惱), 괴로움(苦)이 있게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생사가 단순히 육체적인 생사를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나고 죽는데서 오는 정신적인 괴로움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3. 육바라밀(六波羅蜜)

육바라밀(六波羅蜜)은 대승보살(大乘菩薩)의 여섯가지 중요한 수행덕목(修行德目)으로 실천적 불교수행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육바라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살(菩薩)의 의미를 명확히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보살이란 보리살타(菩提薩? : Bodhisattva)의 준말입니다. ‘보리’는 깨달음, ‘살타’는 중생(衆生)이란 뜻으로서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이란 뜻입니다. 즉, 중생의 세계에서 깨달음을 구하고 중생을 제도(濟度)하는것(상구보리 하화중생 : 上求菩提 下化衆生)이 보살의 최상과제인 것입니다. 이는 먼저 깨달음을 얻은 뒤 중생을 교화(敎化)한다는 것이 아님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곧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곧 깨달음을 구하는 것임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지장보살(地藏菩薩)님은 ‘지옥(地獄)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전에는 결코 성불(成佛)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또한 아미타부처님(阿彌陀佛)의 전신인 법장비구(法藏比丘)의 서원(誓願)을 보면 ‘비록 내가 부처가 된다고 하더라도 괴로운 중생에게 깨달음을 열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깨달음을 얻지 않겠다’ 라는 뜻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살은 고통중에 있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완성하는 길이라 믿는 커다란 서원의 실천자(實踐者)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살들이 사회와 중생을 위하여 하는 수행이 바로 육바라밀인 것입니다.

바라밀(波羅蜜 : Paramita)이란 ‘피안(彼岸)에 이른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완성(完成 :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는 길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육바라밀이란 “上求菩提 下化衆生”을 이루기 위한 보살의 간절한 여섯가지 서원이며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육바라밀의 첫 번째는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입니다. 보시바라밀은 한없는 베풀음을 뜻합니다. 우리의 삶은 베풀어주어야 하는 생활인것입니다. 탐(貪)?진(瞋)?치(痴)라는 삼독(三毒) 에 물들어 나를 추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버릴 때 진실로 얻을수 있으며, 그 버리는 정신의 방편이 보시인것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베풀며, 보답을 기대하지 말며 베풀고 후회함이 없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해야겠습니다. 보시에는 재물을 주는 재시(財施), 부처님법을 전해주는 법시(法施) 정신적인 안도감을 주는 무외시(無畏施)의 세가지가 있으며, 이 가운데 법시를 으뜸으로 하고 있습니다.

육바라밀의 두 번째는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입니다. 지계바라밀은 불교인의 윤리적 생활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국가에는 법률이 있고 사회에는 도덕이 있습니다. 불교인이 지켜야할 가장 기본적인 계율(戒律) 목숨을 죽이지 말며(不殺生), 도둑질하지 말며(不偸盜), 사음을 행하지 말며(不邪淫), 거짓말하지 말며(不妄語), 술 마시지 말(不飮酒)라는 오계(五戒)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출가한 비구(比丘)와 비구니(比丘尼)에게는 각각 250계, 348계라는 구족계(具足戒)가 있습니다. 지계바라밀이란 이러한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며, 우리 불자님들은 계율을 지킴에 있어서 부담감을 느끼거나 자만심을 가지지 말아야겟습니다. 계율을 지킴은 윤리적제약이 아닌 새로운 삶을 여는 희망의 가르침이며, 자신의 인격적 완성을 위한 수련임과 동시에 원만한 사회를 이룩하는 첩경인것입니다.

육바라밀의 세 번째는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입니다. 인욕라밀은 괴로움을 받아들여 참는 것을 말합니다. 조금만 분한일을 당해도 못 참거나 좌절하는 등의 마음에 동요가 없도록 하는 것이 우리 불교인들이 가야할 수행의 길인 것입니다. 자기라는 개체에 집착하지 않고 평화스런 마음으로 깊은 애타심을 가짐으로써 인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대립과 분열의 상황에 있을 때 자신의 허물을 가차없이 비판하며 상대를 너그럽게 감싸야 합니다. 철저한 자기반성이 있을 때 나와 이웃이 하나되며, 이상과 현실이 하나가 되고 중생과 부처가 하나되며, 궁극적으로 번뇌와 보리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육바라밀의 네 번째는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입니다. 정진바라밀은 부지런히 노력하여 게으름을 없애는 생활로서 쉼없는 노력을 말합니다. 끊임없는 노력만이 자신의 자세를 가다듬는 양약(良藥)이 되는 것입니다. 흐리멍텅한 마음가짐과 산란한 마음을 바로잡아 끊임없이 열반을 추구하는 자세로 우리의 생활을 이끌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위없는 바른 진리를 남에게 전함으로써 고해(苦海)에서 허덕이는 무명중생(無明衆生)을 깨우치는 일은 보살의 원력(願力)에서 비롯된 끊임없는 자기반성의 채찍으로 매진되어야 하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육바라밀의 다섯 번째는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입니다. 선정바라밀은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사색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존재의 참모습을 밝혀 우리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무지를 타파하려는 종교이기 때문에 선(禪)은 중요한 하나의 수행법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외부 자극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입니다. 마음의 번민은 우리를 우울하게도 하며 방황하게도 합니다. 저 먼 곳에 저 하늘에 진리가 있나 하고 착각하게 되고 끝내 자신을 떠나 진리를 찾으려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깨끗하여 티끌 없는 거울처럼 우주 삼라만상을 다 비춰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참된 마음가짐 안에 있다고 합니다. 선정은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 본래의 참된 자신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확인하는 작업이 선정바라밀인 것입니다.

육바라밀의 여섯 번째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입니다. 반야는 최고의 지혜란 뜻으로 모든 분별심(分別心)을 여읜 지혜로서 앞서 말씀드린 다섯 바라밀을 이끄는 기둥입니다. 반야바라밀에 의하여 모든 존재는 자성(自性)이 비어 있음을 보고 참모습을 직관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사물의 실상을 알려면 현상에만 집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비유를 든다면 만남의 기쁨이 헤어짐의 아픔이 되기도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고, 헤어짐의 아픔이 또다른 만남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을 볼 때 초라하게 지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적 반야이며 은밀한 예지의 빛, 초월적인 지혜로 우리들 가슴속에 숨쉬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반야를 체득하고 생활 속에 실현하려는 노력이 성불의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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