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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화를 버리는 방법(6)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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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304
내용

  아홉째, 화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다. 화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화

 

가 버려지지 않을 때는 그 원인을 파악하여 화를 버릴 수 있다. 화의

 

원인을 찾을 때는 다음과 같이 화가 일어나는 번뇌구조를 이해하는 것

 

이 유용하다.

 

  '어리석음을 조건으로 탐욕이 일어나고, 탐욕을 조건으로 화가 일어

 

난다.'

 

  먼저 탐욕을 조건으로 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자신의 문제에 적용해

 

본다. 탐욕, 즉 집착이 없다면 화가 나지 않는다. 집착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화가 일어난다는 것에 주목하여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반조해 본다. 이처럼 화의 원인이 된 집착을 파악하고 그것 때문에 화

 

가 일어났음을 이해하게 되면 화가 버려질 수 있다.

 

  만약 집착 때문에 화가 일어나는 것을 이해했는데도 화가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더 나아가 그 집착에 어떤 어리석음이 숨어 있는지를 깊이

 

반조해야 한다. 그렇게 집착에 숨어 있는 어리석음을 이해함으로써 집

 

착과 화를 내려 놓을 수 있다. 이처럼 어리석음은 탐욕과 화의 뿌리이

 

다. 때문에 어리석음을 명확히 꿰뚫지 못한다면 화를 근본적으로 버릴

 

수 없다.

 

  한 여자 수행자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보겠다. 그녀는 어떤 모임에서

 

다른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것을 보고 화가 났다. 이 때 그녀는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리고 '나는 왜 화가 나는 것일까? 내가 무엇

 

을 원하는가?'라고 반조해 보았다. 그러자 자신에게 주목받기를 원하

 

는 탐욕이 있었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화가 버려졌지만 더 나아가 그 집착

 

속에 어떤 어리석음이 숨어 있는지 관찰해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주

 

인공이 되고자 하는 집착에는 '내가 있다'라는 어리석음이 숨어 있다

 

는 것을 통찰하였다. 부처님은 자아가 있다는 생각은 전도몽상이라고

 

하면서 무아無我를 설하셨다.

 

  이와 같이 '내가 있다'는 어리석음 때문에 주인공이 되고 싶은 탐욕

 

이 일어났고, 이런 탐욕 때문에 화가 일어난 것을 이해하자 즉시 화가

 

버려졌고 어떻게 화가 일어나고 소멸하는지에 대한 지혜가 생겨났다.

 

이처럼 화를 알아차리고 화의 원인을 반조하는 것은 화에 대한 깊은

 

지혜가 생겨나게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화가 일어났을 경우, 화가 어느 정도 가

 

라앉아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에서 화의 원인을 반조해야 한다는 점이

 

다. 화가 난 상태에서 화의 원인을 찾으려 하면, 마음이 이미 화에 압

 

도당해 있기 때문에 바른 원인을 찾기가 어려울 수 있다. 초보자의 경

 

우 화의 원인을 찾으려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오히려 화를 더 커지게

 

하는 수도 있다. 따라서 화를 어느 정도 가라앉히고 난 다음에 그 원인

 

을 반조해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화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화의 원인은 알지 못하고

 

화를 버리려고만 한다면 화를 억제하고 참는 것이 되어 오히려 괴로움

 

을 키우게 된다. 사람들은 몸에 통증이 있을 대 진통제를 복용한다. 이

 

렇게 하면 당장은 통증이 완화되고 편해진다. 그러나 통증의 원인이

 

치료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병은 계속 진행되고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

 

지면 더 큰 통증이 나타나게 된다. 통증을 완전히 없애려면 통증의 원

 

인을 정확히 찾아 그 원인을 치료해야 한다. 이처럼 화의 원인을 바르

 

게 이해해야 화를 근원적으로 버릴 수 있다.

 

  열째, 화를 낼 대상이나 화 자체가 실체가 없음을 보는 것이다. 이 방

 

법은 상당히 깊은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보다는 예를 들

 

어 설명하겠다. 한 남자 수행자는 어던 사람에 대한 깊은 원한이 있었

 

다. 그는 평소에는 괜찮다가 그 사람만 떠올리면 불같이 화가 일어났

 

다. 이런 분노가 일어나는 원인을 찾아보았더니 그사람을 아주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고, 그런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었다. 그런 집

 

착이 일어난 것은 그를 나쁜 사람으로 실체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화를 낼 대상이 변하고 있고 실

 

체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원한을 가졌을 때의 그 사람은 이미 변

 

해서 사라졌으며 지금의 이 사람은 과와는 다른 사람이다. 이처럼 화

 

를 낼 대상이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화는 저절로 버려진

 

다.

 

  또한 자신에게 일어난 화 역시도 자신과 동일시하여 '나의 화'라고

 

받아들이면 화를 떨쳐 버리기가 힘들다. 우리는 '나를 화나게 했고 내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내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화는 항

 

상 '나'라는 것과 함께 일어난다.

 

  그런데 깊이 통찰해 보면 화라는 것도 마음과 대상의 접촉에 의해 일

 

시적으로 일어난 심리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화를 낼 대상이 없

 

다면 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대상을 아는 마음이 없다면 화는 일

 

어나지 않을 것이며, 마음과 대상이 만나는 접촉이 없다면 화가 일어

 

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화는 조건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심

 

리 현상일 뿐이며, '나'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님을 의미한다. 이렇게 화

 

는 작용은 있지만 실체가 없음을 통찰해서 화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

 

다.

 

  이러한 열 가지 방법을 염두에 두고 화가 일어나는 상황마다 자기만

 

의 적절한 대처법을 적용하여 노력하다 보면 화를 버리는 방법에 대한

 

지혜가 생겨난다. 화는 오랜 세월 반복되면서 만들어진 습관이기 때문

 

에 한 번 노력한다고 해서 금방 사라지지는 않는다. 항상 정신을 차리

 

고 또렷하게 깨어 있는 노력을 지속하면 나중에는 깨어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화가 일어나는 시간이 적어질 것이다.

 

  화를 버리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아는 것은 지식에 불과하다. 실제

 

나의 삶에 적용해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쌓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

 

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혜는 그냥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전 속에서 익혀지는 것임을 잊지 않고 꾸준히 실천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화를 버리는 것이 수행의 시작이다.

 

  화는 안의 대상과 밖의 대상, 즉 자신에 대한 화와 타인이나 사물에

 

대한 화로 나눌 수 있다. 밖으로 화를 내는 경우는 쉽게 화라고 이해하

 

지만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은 화라고 이해하지 못해서 방

 

치하기 쉽다. 자신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대로 보지 못하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화를 버리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해 보면 의외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자신

 

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적고 자신에 대한 불만을 가진 경우가 많

 

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족은 살아가는 데 큰 장애로 작용하고, 수행

 

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 해도 자

 

신에 대한 분노가 있으면 마음이 경직되어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하

 

고 갈등하게 된다. 먼저 자신에 대한 화를 버리고 마음의 태도를 바로

 

잡아야 바른 수행이 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갖추고 태어날 수는 없다. 누구나 부족한 것이

 

있다. 그런데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나 능력 그리고 주변 환경에 대해

 

흠을 잡고 불만을 가진다면 자기를 병들게 만드는 요소가 될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자업자득을 말씀하셨다. '업의 주인은 자신'이라는 것

 

이다. 그렇다고 해서 업에 의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포기

 

하라는 것이 아니다. 현재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결국 자신이 만든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에게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자신이 가난한 것은 전생에 가진 것이 있음에도 인색해서 복을 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불만스런 마음이 어느 정도 내려 놓아지

 

고 오히려 이생에 아주 작은 것이라도 보시하려는 생각을 하게 될 것

 

이다. 이생에는 능력이 닿는 만큼 공덕을 지으며 살아야겠다고 마음먹

 

고 실천하다 보면 문제가 잘 풀리 수도 있다.

 

  『법구경』게송 116번에 보면 어느 가난한 부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부부는 하의는 각자 한벌씩 있지만 상의는 한 벌 밖에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한 사람이 외출하면 한 사람은 윗도리는 벌거벗은 상태로

 

집에 있어야 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러 갈 때도 한 사람씩

 

교대로 가야 했다. 어느 날 남편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다가 환희심이

 

일어나 한 벌밖에 없는 옷을 보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옷을 보시하고 나면 당장 입을 옷이 없을 뿐더러 둘 다 벌

 

거벗고는 외출을 할 수 없으니 난감한 일이었다. 초경에 보시하려다

 

갈등하고 이경에 보시하려다 갈등하다가 마침내 상경에 보시를 했다.

 

'내가 이생에 이렇게 가난한 것은 전생에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 같은 분을 만난 이때에 공덕을

 

짓지 못한다면 언제 내가 공덕을 지을 수 있을까'하고 지혜롭게 반조

 

한 후에 용기를 내어 자신의 전 재산과 같은 한 벌의 옷을 보시한 것이

 

다.

 

  그리고 스스로를 극복한 것이 대견해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 자리에

 

있던 빠세나디 왕(부처님 당시 꼬살라국의 왕)이 그 환호성을 듣고 무

 

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왕은 매우 어려운 보시를 한 가난한

 

부부의 자초지종을 듣고 바로 그 자리에서 많은 상을 내려 그는 바로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만일 그 사람이 자신의 가난을 한탄만 했다면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현재의 가난이 자신이 과거에 지은

 

공덕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혜롭게 판단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자신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옷을 부처님께 보시했기 때문에 그 생에

 

서 즉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지은 업은 스스로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업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조건들이 연계되어 현재

 

의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숙명론이 아니다.

 

현재 일어나는 일들은 과거의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짐나 현재의

 

노력을 통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부처님 당시에 앙굴리말라는 뛰어난 바라문 수행자였지만 외도 스승

 

에게서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 사람을 999명이나 죽였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죽일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 때 앙굴리말라 앞에 부처

 

님이 나타나셨다. 앙굴리말라는 한때 살인자였지만 부처님을 만나 바

 

른 수행을 하게 되어 결국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이 된다. 만약

 

부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남은 삶도 수많은 사람을 죽인 자책감에 괴

 

로워하며 살아야 했을 것이고 다음 생에는 말할 것도 없이 지옥의 고

 

통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악인은 없다. 앙굴리말라도 잘못된 스승을 만나

 

극악무도한 악행을 저지르게 되었지만 부처님을 만나 성자가 될 수 있

 

었다.

 

  아라한이 되면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

 

에 과보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 있는 그 생에는 과보를 받았다.

 

앙굴리말라는 아라한이 되었지만 탁발을 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살인

 

자라고 돌을 던져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고 나중에는 돌에 맞아 돌아

 

가셨다. 절대적인 악인이라는 실체는 없지만 그렇다고 인과가 없는 것

 

은 아니라는 것이다.

 

  『법구경』173번 게송에 보면 앙굴리말라에 관한 가르침이 나옹다.

 

 

   지난 날 저지른 악행을

 

  선행으로 덮는 사람

 

  그가 세상을 비추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지난간 삶에서 과오가 있었더라고 그것에 대해 자꾸 후회하며 자신

 

을 괴롭히지 말고 선업으로 덮는 것이 좋다. 선업을 짓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어리석게 살

 

았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선업을

 

짓는 방법 외에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다른 방법은 없다. 작은 악행

 

하나를 저질렀다고 생각한다면 선행을 산더미처럼 지으면 된다. 그러

 

면 이 악행이 결과를 만들어 낼 기회를 가지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앙굴리말라 같은 분도 만약 계속 그렇게 살았다면 무간지옥에 갔을

 

것이고 그 후에도 태어나는 생마다 엄청난 과보를 받았을 것이다. 그

 

런데 부처님을 만나 잘못을 크게 참회하여 다시는 그런 악행을 하지

 

않았고, 바른 수행을 하여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에 구름에서 벗어난

 

달처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노력하면 누구나 변할 수 있다.

 

  지금까지 화를 버리는 여러 방법들을 알아보았지만, 아는 것으로 끝

 

나서는 소용이 없을 수 있다. 자동차가 고장 나면 정비소에 가서 어디

 

를 얼마나 고쳐야 할지 점검을 받는다. 하지만 견적서만 받아들고 그

 

대로 차를 가져가 버리면 차는 여전히 고장 난 상태로 애를 먹을 것이

 

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부족한 점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았다면, 그

 

다음에는 바른 방법으로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랜 세월

 

익혀 온 습관이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

 

은 우리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의 모습이 아니라 변화의 과정에 있다. 지금 만

 

약 그릇된 견해에 빠지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만, 마음을 바꿔서

 

바르게 노력하면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어리석음이나 번뇌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노력에 의해얼마든지 변

 

화 가능하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의 가르침이다. 만약 태어날

 

때부터 선인과 악인, 악마와 천사가 구분되어 있다면 더 이상의 변화

 

없이 영원히 그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변화가 없다면 이 세상은 참

 

으로 괴로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존재라도 부처나 아라한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셨다. 우리 모두는 부처나 아라한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

 

지고 있지만 현재 어리석음이나 번뇌가 작용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행

 

동을 하는 것이고, 지금 복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가난하거

 

나 또는 세속적인 조건에서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이다.

 

  지금은 모자라고 부족하다 하더라도 누구나 부처나 아라한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굳

 

게 믿어야 한다. 지금은 번뇌로 마음이 오염되어 있지만, 수행을 통해

 

번뇌를 버리면 나에게 있는 지혜가 다시 발현될 것이다. 지혜가 발현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수행에 접근해야 수행이 가능하다.

 

  현재 모습은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현재의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보

 

라. 그 가능성에 마음을 두고 지금 현재 자신이 부족한 것을 메우려고

 

노력하라.

 

  자신에게 복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공덕을 짓는데 노력하고, 지

 

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지혜를 키우는 노력을 하면 된다. 붖고한

 

것을 하나하나 메워 나가다 보면 사람은 성장을 하게 되어 있다.

 

  바른 이해와 바른 노력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을 다시 한 번 사성제의 틀로 정리해 보겠다.

 

자신의 마음에서 화가 일어났을 때 화라는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거나

 

나의 화라고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아야 한다. 단지 적당한 조건의

 

결합에 의해 일어난 화라는 심리 현상으로만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화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며 화와 다투지 않고 화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화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것이며 '고성제'에 대한 이해이다.

 

  화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집성제'에 대한 이해이다. 화의 원인을

 

소멸하여 화가 소멸된 상태를 통찰하는 것은 '멸성제'에 대한 이해이

 

다. 화를 버리는 열 가지 방법을 바르게 통찰하는 것은 화의 소멸로 인

 

도하는 길인 '도성제'에 대한 이해이다.

 

 

  이와 같이 화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원리를 사성제의 패러다임으로

 

철저하게 이해하고 실천하게 되면 화는 버려진다. 화는 참아서 버려지

 

지도 않고 화를 쏟아 냄으로써 버려지지도 않는다.또한 화를 버리고

 

싶은 욕심만으로 버려지지 않는다. 화는 화에 대한 바른 이해와 바른

 

노력을 통해서만 버려진다.

 

  여기서 배운 이해와 방편들을 나의 삶의 실전 속에 적용해서 자신만

 

의 노하우를 쌓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

 

혜는 그냥 생각만으로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전 속에서 익혀지

 

는 것임을 잊지 않고 꾸준히 실천함으로써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얻으시기를 바란다.

 

※ 조계종 출판사 화를 버리는 방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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