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3. 화의 소멸
애초에 답이 없는 문제는 풀어야 할 필요가 없다. 답이 분명히 있다
고 알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 화가 버려지면
어떤 행복이 있는지 명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선법善法에
대한 믿음이다. 화의 속성을 분명히 알고 화의 원인을 버려 화가 소멸
되면 지혜와 자애가 드러나게 됩니다.
화가 소멸되면 네 가지 고귀한 마음이 드러난다
화의 반대는 화없음不嗔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아미담마에서 화없음은 자애와 같은 법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화를
버린다는 것은 자애심을 증장시킨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애심은 나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중생이 행복하고 안락하기를 바
라는 마음이다. 자애심은 항상 다른 사람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설사
상대방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하더라도 남과 다투지 않는다. 그래서
자애심을 다른 말로 다툼이 없다는 의미의 무쟁無爭이라고 표현하기
도 한다.
이러한 자애심은 사무량심의 가르침에 잘 나타나고 있다. 사무량심
은 자비희사慈悲喜捨를 말한다. 자는 자애심, 비는 연민심, 희는 함께
기뻐함, 사는 중립적인 평온이다. 우리가 보통 자비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애와 연민을 합친 개념이다.
자애심은 남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타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고, 연민심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해서 고통을 덜어 주고
자 하는 마음이다. 함께 기뻐함은 남이 잘되거나 성공한 것을 진심으
로 기뻐해 주는 것이고, 평온함은 그런 모든 감정들 속에서 자만하지
않고 중립적인 것을 말한다.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인 자애심
이 생기면 주위에 고통받는 존재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그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는 마음, 즉 연민의 마음을 내게 된다.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서 그 존재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좋아하
고 행복해 할 때 함께 기뻐해 준다. 그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고
통을 덜어 주고 함께 기뻐하지만 거기서 내가 했다는 상想은 내지 않
고 이것은 자업자득이다, 스스로 선업공덕을 지은 것이지 누구에게 상
을 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한걸음 물러서서 평온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자애심은 이런 식으로 무량하고 고귀한 마음인 사무량심으
로 확장된다.
사무량심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기억하라
사무량심에 대해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먼저 자애심과 탐욕을 구분
할 수 있어야 한다. 탐욕은 자기가 원하는 방향을 이루고자 하는 이기
심이 바탕이 되는 반면, 자애심은 상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이타적인
마음이 바탕이 된다. 자애는 내가 원하는 행복이 아니라 상대방이 진
정으로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남녀 간의 사랑에서도 상대의 마
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상대에게 너무 집착해서 그 사람을 구속하고 무
조건 옆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애라고 할 수 없다. 자애심
과 탐욕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또 연민과 슬픔을 구분하지 못할 수 있다. 상대의 감정에 공감을 한
다는 면에서는 비슷하지만 연민은 동요가 일어나지 않고 깨어 있는 마
음인 반면에 슬픔은 내 마음도 상대의 감정에 휩쓸려 버린 성냄의 상
태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큰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그 감정에 동조하
여 함께 울고 불고 하는 것은 연민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자기 마
음이 동요하지 않고 평온해야 고통에 처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 그 상황에 적절하게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함께 기뻐함은 들뜸이 있는 기뻐함과 구분해야 한다. 서로가
웃고 더들며 왁자지껄하게 마음이 들떠서 기뻐하는 것은 해로운 법이
다. 함께 기뻐함은 단지 상대의 성공에 대하여 마음의 동요 없이 함께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함께 기뻐함은 질투심을 버리는 데 아주 효과
적이다. 질투는 흔히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처럼 남이
잘된 것에 샘을 내는 것이지만 함께 기뻐함은 다른 사람의 성공을 진
심으로 같이 기뻐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방(미얀마, 라오스, 태국
등)에서는 누가 선한 행위를 하거나 좋은 일이 있으면 항상 '사-두,
사-두, 사-두'하고 세 번 말해 준다. 사-두는 '잘했다.', '훌륭하다'는
의미로 『금강경』에 나오는 선재善哉와 같은 뜻이다.
마지막으로 평온함은 앞에서 말한 모든 선행을 했지만 그것에 대해
'내가 했다'고 자만하지 않고 중립적으로 평온하게 바라보는 마음을
뜻하는 것으로, 자신이 편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남에게 무관심한
것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선행은 다른 사람을 위해 한 것이지만 남
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어디로 사라지지 않고 결국에는 자신의 이
익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지혜를 갖고 한걸음 물러서서 중립적으로 평
온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자비심을 바탕으로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 중 하나가 '나'라고 하는 것은 고정불변
의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의해결합된 것이라는 무아無我 사상이다. 세
상의 모든 것들이 조건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이해하면 '나'라는 것도
그물망처럼 얽힌 관계 속에서 존재할 뿐 나와 남이라는 것을 따로 떼
어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는 연기적인 이해가 바탕이 되어 있다. 세상이 연기적으로 존
재한다는 지혜가 있으면 남을 위하는 자비심이 생기고, 자비심이 바탕
이 되면 마음이 안정되어 지혜가 생기는 조건이 된다. 자비심을 바탕
으로 해서 지혜가 생기고, 지혜를 바탕으로 자비심이 드러나는 것이
불교 본연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자비심을 바탕으로 한 지혜의 마음이 드러나면 직면하는 문제들을
슬기롭게 풀어 나갈 수 있다. 설사 문제가 즉각적으로 해결되지는 않
는다 하더라도 인내하며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하게 살면 손해 보는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
다. 누가 나아게 악한 짓을 해도 무조건 참고 내버려 두는 것이 불교에
서 말하는 선善은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문제가 있으면 화를 내
는 대신 지혜와 자비가 있는 마음으로 문제를 지적하고 충고해 줄 수
있다. 그럴 때 상대는 오히려 거기에서 훨씬 더 신뢰감을 느끼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화를 내지 않고 편안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
기가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남이 쉽게 보지
못한다.
부처님께서도 제자가 어리석은 언행을 하는 경우에는 엄하게 꾸짖으
셨다. 다만 그것은 그 사람을 위해 유익한 것을 알려 주신 것일 뿐이
지, 그 때 부처님의 마음에 흔들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비심을 바탕으로 한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멀리 내다보았을 때 어
떤 것이 나에게 유익한 것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
에 화를 내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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