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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명상이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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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422
내용
∥. 인생은 명상이다.

1. 명상이란 말

요즘 우리사회에 명상처럼 자주 쓰이는 말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명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는 시대의 흐름이고 요구사항인지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명상이란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정확하게 이해하면 분명 자신의 삶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직접 명상을 공부하여 체험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그러나 누구나 손쉽게 명상공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명상이 좋다는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어도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아직 거기에 익숙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명상을 위한 사회분위기가 좀 더 성숙되어야 할 것 같다.
돌아보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나라 전체가 먹고사는 일에만 골몰했다. 자신의 존재나 건강은 미처 돌볼 겨를도 없이 오직 안심하고 먹고 사는 경제발전에만 매달려 살아왔던 것이다. 요즘 들어 어느 정도 살게된 뒤에서야 차츰 자신의 존재나 삶의 질을 생각하고 찾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를 찾으려고 고요하게 앉아 있는 것에 아직은 어색하고 서툴다. 또 그동안 너나 없이 뛰다시피 인생을 살아왔기에 이제 조금 속도를 늦추었다해도 아직 가쁜 숨이 다 진정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호흡조절과 명상을 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시간이 아직은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2. 전통적인 명상
사실 명상처럼 다양하고 포괄적인 말도 드물다. 어떻게 보면 내용적으로는 거의 비슷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사뭇 다른 의미로 표현되어 헷갈리기 쉽다. 자신이 전문가에게 지도받으면서 직접 하나하나 체험해 보기 전에는 애매모호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사람마다 제각기 명상의 뜻이 다르고 방법이 다르고 설명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여럿 중에서 어떤 한 가지를 콕 집어서 선택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또 조심스런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기서는 명상에 대해 적당히 이것저것 절충하여 말하지 않고 비교적 객관성을 지닌 고전적인방법을 선택하려고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최근에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여러 명상에 대한 신생개념이 아니라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전통적인 명상형태에서 그 기준을 찾으려고 한다. 비록 그것이 좀 어렵다하더라도 오랫동안 검증되어온전통적인 명상법이 그래도 가장 확실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서다.
명상은 주관과 객관이 합일한 경지, 아니, 자신의 주관인 정신이 객관의 대상과 둘이 아닌 경지가 명상이다. 한마디로 주객미분(主客未分)의 인식이전의 원형을 유지하는 경지가 명상이다. 나아가 이미 우주 적인 명상 속에서 살고 있기에 삶 자체가 명상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명상을 찾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에 대한 이해나 믿음이 명상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자격이다.
사실 우리가 말하는 전통적인 명상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여러 형태다. 그 중에서 사람들에게 친숙한 것 몇 가지만 예로 들면,
“성인(聖人)의 이름을 자기가 부르고 자기가 들으면서 듣는 당체를 의심해 파악해 가는 염불일념, 성인의 온갖 덕성을 자신의 생각으로 그리는 관법 일념, 오직 화두만 잡두리하여 붙들고 나아가는 참선일념, 진언을 일사불란하게 이어가는 진언일념, 자신의 들고나는 호흡의 수를 따라 가는 수식일념”등등이다.
이렇게 형태와 형식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결국 공부의 과정과 주안점에서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자신이 선택한 하나의 공부에 나머지 다른 것은 기초가 되거나 아니면 도움이 되거나 하는 정도의 상호보완, 평등한 관계이지 상하의 우열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기에 자신이 하고있는 공부에 통하면 다른 공부는 저절로 얻게 된다. 다만 각자의 근기에 따른 공부과목의 선택만 다르다.
참선에 대한 고인(古人)의 가르침을 보면,
“일어나는 마음, 일어나지 않는 마음-이 두마음은 진실한 마음이 아니니, 이 두 마음을 떠난 마음이 허공을 비춤을 알게 되는 것이 곧 성품을 보는 것(見性)이다.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있는 자는 이미 성(性)을 보아 세상사를 한 물건도 없는 것으로 요달해 마친 것이니, 그 성이 둘이 아닌 것을 알고 둘이 없는 성품이 곧 밝은 불성(佛性)이니라.”라고 했다. 여기서 호흡법이니 관법이니 하는 여타의 것은 이 참선공부에 기초를 형성하거나 북돋워주는 보완과 상조의 입장에 있음을 다시 보게 된다.
그러나 공부를 지어가는 것에 대한 이런 설명이 실로 간단치 않기에, 여기서는 방법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깊이나 내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론이나 논리가 아니라 체험이기 때문이ㄷ고, 글이 갖는 표현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세상의 뜻 깊은 일은 어느 것 하나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형성해 놓은 틀을 개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명상인데, 가장 어려운 일이 이 틀을 깨고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신의 틀은 밖에서 깨지 못한다. 그처럼 명상 또한 쉽게 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알아야한다. 반드시 그만한 노력을 기울이고 아픔을 극복하고 대가를 지불해야 도달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안심입명의 세계이다. 명상은 안심입명이다. 틀이 없는 세계다.

3. 자신과 대상이 둘이 아닌 마음의 명상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하려면 무엇이든지 쪼개고 나누어 토막 내면 안된다. 명상공부 또한 삶 따로 공부따로 나누어 보면 안 된다. 일상사의 삶 모두가 명상이어야 한다. 즉 삶이 명상이고 명상이 곧 삶이어야 한다. 사실 명상 속에서 산다. 그러므로 어떠한 이유로도 삶을 조각조각 나누거나 훼손시켜서는 안되기에 삶과 명상은 결코 나뉘어질 수 없다. 따라서 명상을 통해 인생을 온전히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명상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복잡해지거나 나뉘는 일이 생기면 폐단만 한가지 더 보탤 뿐이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훼손하지 않고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즉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대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분석이 아닌 직관으로 가능하게 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명상을 통해 인생은 전성적(全性的)으로 이해되어 모든 것이 온전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삶 전체를 명상으로 보는 관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일상(日常)에 대한 생각의 순수함, 삶의 청정함을 말한다. 또한 그것은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렇듯 일상생활 모두가 명상이라는 사실에 대한 착안과 이해와 실천이야말로 명상을 통한 삶의 획기적인 변혁을 이뤄준다.
여기서 잘 알아야할 점은 명상에 대한 공부를 따로 한다 해도 그 실제는 어디까지나 현실생활에서 얻는다는 점이다. 이점을 구체적인 예를 들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느끼는 상식이다. 즉 명상에 대한 공부는 결과적으로 현실생활을 더욱 충실히 하기 위한 과정과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명상을 통해 무슨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항상 깨끗하여 명랑하고 상쾌해야 한다. 이러한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현실의 삶은 온전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전문적인 명상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일상적인 삶의 순수하고 성실한 태도를 통해 명상을 얻을 수도 있고 점점 크게 익힐 수도 있다. 쉽게 말하자면 성실한 삶이 곧 명상이라는 뜻이다. 물론 단순히 일상에 대한 충실성, 순수성에 대한 태도만으로는 전통적이고 전문적인 명상의 세계에 도달하지는 못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4. 성실한 삶, 그 자체가 명상
사람은 어릴 때부터 교육을 통하여 자기를 극복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결국 이것이 일생동안 모든 일의 근본이 된다. 자기를 벗어나야 적멸인 명상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역시 따로 하는 명상공부에 있어서도 자기극복이 우선이며 기본이다. 그러므로 자기 극복의지가 없거나 약하면 명상은 불가능하다. 자기극복이라는 마음 조절능력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단련해야 조금씩 커지고 단단해진다.
자기 극복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대상으로 하기에 다잡아서 수련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늘 제멋대로인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이 길 외에 다른 지름길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극복이 아무리 어려워도 명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본바탕이다.
이 말은 불교에서 ‘선정(禪定)에 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를 지켜야 한다’는 말과 같다. 생활자체가 안온한 명상이 되기 위해서는 감정의 절제를 통한 생활의 질서가 필수다. 마치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구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방임 속에서 자유는 불가능으로 없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구속 안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어야 그것이 참된 자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일상생활이 명상이 되어야 한다는 대원칙이 없는 요즘 유행하고 있는 명상형태들은 하나의사치이고 치장일 수 있으며 일시적인 도피나 회피 또 잠깐의 휴식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성실한 삶이 명상이라는 일상명상은 전문명상에 비해 깊이가 다르고 폭이 다르며 일시적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렇다 해도 삶 속에서 바로 명상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인생의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성공은 얼마만큼 자신의 삶의 충실성과 순수성에 몰입할 수 있는 지속적인 명상의 힘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더 쉽게 말하자면 청춘남녀의 열렬한 사랑이라든지, 운동선수가 운동에 몰두하거나, 예술가가 예술에 빠져들 경우, 또 기사(棋士)가 바둑에 몰입하거나, 과학자가 연구에 빠져들 때, 아니면 사업가가 일에 빠져든 상태, 또는 독서 등 취미에 빠졌거나 그 무엇에든지 자기분야에 빠져서 나뉘어지지 않는 주객의 합일된 집중의 정신상태를 이루면 일종의 명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지속성과 순수성의 문제가 명상의 질과 수준을 결정해 줄 뿐이다.
따라서 평범한 우리 인생살이에서도 자기가 맡은 분야에 정성을 기울여 최선을 다하는 것, 무슨 일이든지 매사에 열심인 것도 하나의 명상이다. 가능한 이런 상태가 자주, 오랫동안 지속되어야만 자신의 능력이 드러난다. 이른바 앞에서 언급한 사회적인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인류의 모든 문명발달의 기저에는 이와 같은 명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단지 과거에는 명상이라는 말을 쓸줄 몰랐지만 명상에 관심을 갖게 된 오늘날 현대인들은 그것을 노동명상, 독서명상, 놀이명상, 예술명상 등 여러 가지 ‘생활명상’의 친근한 이름으로 부른다. 다만 여기서는 명상의 동기와 목적, 방법에 따르는 여러 문제는 거론치 않기로 한다.
그러나 정신과 대상의 합일된 상태라고 해도, 약물이나 특수한 방법으로 자신의 정신을 혼절시키거나 빼앗기는 것, 강제로 이탈시키거나, 혼탁하게 하는 경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명상은 오직 자신의 의지와 주체적인 노력에 의해서 대상과 둘이아닌 상태에 머물렀을 때다. 또는 획기적인 노력에 의해서 대상과 둘이 아닌 상태에 머물렀을 때다. 또는 획기적인 인식전환을 통해 자신이 이미 만고의 명상 속에 안주하고 있음을 믿을 때다. 이런 경우만 안심(安心)이나 평화, 또는 삼매(三昧)라고 말할 수 있겠다. 반대로 자신의 정신과 대상이 주관과 객관으로 분리되면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고, 이렇게 주객(主客)이 상대적으로 나뉘어져 갈래갈래 분산된 상태에서 일으키는 생각은 번뇌이며 망상일 뿐이다. 충실성이 없는 정신상태를 말하고 있다.

5. 인생은 명상이다.
사람의 정신은 일을 할 때나 사람을 만날 때나 어느 때든지 온전(대상과 합일)해야 한다. 온전하지 못하고 두 마음을 가지게 되면 정신이 나뉘어 진 것, 즉 명상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사람에도 일에도 사물에도, 그 대경(對境)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정신이 합일된 상태 불이의 경지로 가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런 과정은 이미 명상이 일어지고 있는 상태다.
사람이 대상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이 없다는 것은 정신의 온전함과 성숙을 뜻한다. 즉 정신이 건강해야 모든 대상을 온전하게 볼 수 있고 바로 대할 수 있다는 말이다. 명상자는 상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나 못났다는 생각이나 중생이라는 생각을 결코 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상대와 합일되지 못하면 곧 자신의 우월감에 빠져 교만해지고 불화와 투쟁, 대립을 불러온다. 찌꺼기 같은 것은 모두 자신 안에 있다.
그렇다고 그 합일이 맹목적이거나 맹신적이지도 않다. 다만 대상을 마주함에 자신의 정신을 온전히 할 뿐이다, 주객을 분리시켜 관계를 이탈시키거나 악화시키지 않는다는 뜻이지, 남을 무조건 믿고 속으라는 게 아니고 또 적당히 넘어가라는 말도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명상으로 정신을 온전히 하여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근원적인 주객자타의 연기적 일체성을 직시하라는 뜻이다.
만약 정신과 그 대상이 분리되면 자연 대립이 생기며 갈등과 투쟁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오늘날 개인의 소외감이나 국가 간의 날카로운 대립은 참다운 명상문화가 없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평화의 원리를 명상에서 얻어야 한다는 주장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세계는 근원적인 철학(정신)없이 오직 눈에 보이는 물질의 물리적인 힘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 결과 점점 더 물리적인 힘에만 의존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져 온것, 그것이 생존경쟁의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힘만이 존재하고 정의가 되고 폭력의 합당한 논리만 대의명분으로서 확대 재생산 되어온 인류발전사-그러기에 바른 명상은 인류의 미래 생존문화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6. 명상언어는 명상에 들게 하는 연결고리
명상언어는 거울이다. 명상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부족을 느끼면 그 자리에서 부끄러워하고 잘못을 느끼면 바로 뉘우친다. 단지 표현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평범한 마음이다. 흔히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도 감명 깊은 글 한 줄을 읽게 되면 그것으로 자신의 내면을 떠올리고 자신의 행을 비추어 본다. 그 짧은 순간, 글 한줄과 자신은 합일되는 것이다. 그 한줄의 글은 바로 자신을 명상으로 이끄는 연결고리가 된다. 이른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인 명상언어다.
사실 글 한 줄뿐이 아니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 속에서도 자신을 떠올려 비춰 본다면 그 또한 명상고리이고 명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상은 움직이는 것도 아니지만 반드시 고요한 것만도 아니다. 무엇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합일된 정신작용, 둘이 아닌 상태이다. 반성하고 다짐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그 모든 것이 명상이고 명상에서 얻어진 결과이다. 그래서 합일된 정신작용만 늘 살아 있으면 명상언어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감지되는 모든 것이 명상언어이고 그러므로 순간순간이 명상의 연속이다. 삶은 명상이다.
이 말은 명상은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시공을 초월해 오로지 명상은 주객의 합일을 말하고 있고 이미 이루고 있다. 또 그것은 시간의 장단(長短)에도 관계없고 일의 많고 적음에도 관계없다. 아주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를 생각한다 해도 그 한 가지마다 매 순간 온전하기만 하면 명상이다. 바른 생각만 가리면 말이다. ‘백천삼매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더 군말이 필요 없겠다.

7. 모두가 명상언어
사람은 자신의 정신과 대상의 합일을 통해 진실한 자기를 깨닫고 진실한 세계를 만난다. 바로 명상의 세계이고 명상의 힘이다. 여기에는 사람의 그 어떤 외형적인 신분의 차이도 영향을 끼칠 수 없다. 다만 얼마만큼 깊은 명상에 이르렀느냐 하는 명상의 성숙도만 차이가 날 뿐이다. 그래서 정신작용이 나타나는 모든 곳에서 명상은 성취되는 것이다. 다만 명상의 연결고리인 명상언어가 자신의 정신수준에 잘 부합하는 말일 수도 있고, 글일 수도 있으며, 또 그 밖에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명상은 향상일로(向上一路)다.
그러니까 명상의 연결고리는 무엇으로 딱 고정되어 있지 않다. 다만 진지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대상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만 하면 모두가 중요한 명상의 연결고리, 곧 명상언어가 되는 것이다. 설령 좋은 말이 아닌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이나 욕이라고 하더라도 대립 없이 순수하게만 받아들이면 곧바로 자신을 성숙시키고 향상시키는 좋은 명상언어가 된다. 비난이나 욕설은 또 다른 각도에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에, 그래서 자신의 정신이 접하는 모든 대상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고리 역할을 하는 명상언어다. 일상이 곧바로 명상이 되는 경지다. 사실은 명상 속에 살고 있다.

8. 명상은 회광반조廻光反照다.
다만 대상의 본질을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깊은 명상이 된다. 즉 글 한구절을 읽고 음미하면서 자신을 자세하게 비추어 보면 명상이고, 이미 읽었던 글이라고 해도 과거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된다면 이 또한 좋은 명상이다. 이런 모든 과정을 ‘명상언어를 통해 명상에 들어간다’고 말하며 또 ‘명상언어를 자기화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자기화 하는 과정은 각양각색이다. 뉘우침과 다짐도 있고 기쁨과 슬픔도 있으니.
결론적으로 이런 모든 것이 주객미분의 정신작용인 명상이다. 말하자면 명상은 회광반조이고 내외명철內外明徹이다. 그래서 명상언어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솔직하게 그대로를 받아들여 자신을 향상시킨다. 그러므로 명상을 자주 할수록 내면은 깊어지고 빛나는 것이며 자신의 덕성은 저절로 넘치게 되므로 向上一路를 따로 가지 않아도 자연히 향상일로를 걷게 된다. 마침내 끝없이 ‘열린마음’으로 ‘웰빙’으로, ‘열반행로涅槃行路’를 가지게 되는 것, 모두를 회통會通한 명상이다. 그래서 인생은 더 더욱 명상일 수밖에 없다. 바른 생각은 명상에서 나온다. 명상을 모르는 사람도 바른 생각을 하면 이미 그는 명상 속에 있다. 나아가 우주법계는 명상이다. 다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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