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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나무이야기]
1. 홍도동의 지명 유래
백제 때는 우술군(比風君)에 신라때는 비풍군(比風君)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초기에 회덕현(懷德懸)에 속했다가 현종 때에 공주부(公州府)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엔 다시 회덕현에 속했다가 조선시대 말기엔 회덕군(懷德君) 외남면(外南面)의 지역으로서 복숭아 나무가 많이 있으므로 홍돗골 또는 홍도(弘道)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세교리(細橋里), 동산리(東山里), 무릉리(武陵里) 일부와 내남면의 봉촌(鳳村) 일부를 병합하여 홍도리(弘道里)라 하여 대전군 대전면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 대전부 시설에 따라 대덕군 외남면에 편입되었다. 1940년 대전부 구역 확장에 따라 대전부에 편입되어 홍도동이라 하였는데 1946년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홍도동(弘道洞)이 되었다.
2.옛 사람들은 복숭아 나무가 요사스런 기운을 몰아내고 귀신을 쫓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복숭아의 원산지인 중국에서는 복숭아나무로 만든 도장,
활 또는 막대기(회초리)조차 그런 힘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병마와 악귀를 쫓기 위해 새해 복숭아나무로 만든 인형을 대문에 달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복숭아나무는 집안에 심지 않는다고 한다.
제사 때 귀신들이 복숭아나무가 무서워 운감하지 않기 때문이라나.
제사상에 복숭아를 쓰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
왜 그런 생각을 하였을까.
재배역사가 오랜 중국에서는 복숭아에 얽힌 많은 고사들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서왕모(不死의 신선)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예부터 복숭아를 신선들과 더불어 있는 신령스런 나무로 대해왔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복숭아 열매는 신선들처럼 장생(長生)을 상징하기도 했다.
3.중국 진(陳)나라 효무제(376-396) 때, 무릉(武陵)에 살던 어부가 계곡을 따라 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 숲 속의 어느 동굴을 지나 복사꽃이 만발하게 피어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한 마을을 발견한다. 그곳에는 논밭이 넓고 먹거리가 풍족하며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남녀노소가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어부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며칠 지낸 뒤에 집으로 돌아온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실려있는 유토피아의 모습이다.
4. 하늘나라에는 신선이 먹는 천도(天桃)가 있었다. 전설적인 신선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먹은 동방삭은 삼천갑자년, 즉 18만년을 살았다한다. 또 서유기에는 손오공이 먹기만 하면 불로장생할 수 있는 천도 밭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있다가 어느 날 9천년에 한 번 열리는 열매를 몽땅 따먹어 버렸다. 그는 이 사건으로 나중에 삼장법사가 구해 줄 때까지 500년 동안 바위 틈에 갇히는 호된 시련을 겪게 된다.
이처럼 수많은 과일 중에 복숭아는 신선이 즐겨먹는 과일로 묘사되고 복숭아 숲은 신선사상과 이어져 유토피아의 대명사가 되었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술잔, 고려 때의 청자연적 및 주전자, 조선시대의 백자연적 등에는복숭아나무의 꽃, 잎, 열매가 그려져 있는 것이 많다.
5.고려 인종 원년(1123년) 송나라의 서긍이 사신으로 왔다가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의 귀족들은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하였으며 피부를 희게 하려고 복숭아꽃 물이나 난초 삶은 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민속으로는 특히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나뭇가지가 잡스러운 귀신들을 쫓아내는 구실을 한다고 믿고 있었다. 무당이 살풀이할 때는 복숭아 나뭇가지로 활을 만들어 화살에 메밀떡을 꽂아 밖으로 쏘면서 주문을 외기도 한다.
6. 세종 2년(1420년) 어머니인 원경왕후가 위독해지자 '임금이 직접 복숭아 가지를 잡고 지성으로 종일토록 기도하였으나 별 효험이 없었다'하며, 연산 12년(1505년)에는 '해마다 봄.가을의 역질 귀신을 쫓을 때에는 복숭아나무로 만든 칼과 판자를 쓰게 하라'하여 왕실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복숭아나무는 귀신을 물리치는 나무였다. 그래서 제사를 모셔야 하는 사당이 나 집 안에는 복숭아나무를 심지 않으며 제상의 과일에도 절대로 복숭아를 쓰지 않는다.
1. 홍도동의 지명 유래
백제 때는 우술군(比風君)에 신라때는 비풍군(比風君)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초기에 회덕현(懷德懸)에 속했다가 현종 때에 공주부(公州府)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엔 다시 회덕현에 속했다가 조선시대 말기엔 회덕군(懷德君) 외남면(外南面)의 지역으로서 복숭아 나무가 많이 있으므로 홍돗골 또는 홍도(弘道)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세교리(細橋里), 동산리(東山里), 무릉리(武陵里) 일부와 내남면의 봉촌(鳳村) 일부를 병합하여 홍도리(弘道里)라 하여 대전군 대전면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 대전부 시설에 따라 대덕군 외남면에 편입되었다. 1940년 대전부 구역 확장에 따라 대전부에 편입되어 홍도동이라 하였는데 1946년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홍도동(弘道洞)이 되었다.
2.옛 사람들은 복숭아 나무가 요사스런 기운을 몰아내고 귀신을 쫓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복숭아의 원산지인 중국에서는 복숭아나무로 만든 도장,
활 또는 막대기(회초리)조차 그런 힘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병마와 악귀를 쫓기 위해 새해 복숭아나무로 만든 인형을 대문에 달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복숭아나무는 집안에 심지 않는다고 한다.
제사 때 귀신들이 복숭아나무가 무서워 운감하지 않기 때문이라나.
제사상에 복숭아를 쓰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
왜 그런 생각을 하였을까.
재배역사가 오랜 중국에서는 복숭아에 얽힌 많은 고사들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서왕모(不死의 신선)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예부터 복숭아를 신선들과 더불어 있는 신령스런 나무로 대해왔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복숭아 열매는 신선들처럼 장생(長生)을 상징하기도 했다.
3.중국 진(陳)나라 효무제(376-396) 때, 무릉(武陵)에 살던 어부가 계곡을 따라 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 숲 속의 어느 동굴을 지나 복사꽃이 만발하게 피어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한 마을을 발견한다. 그곳에는 논밭이 넓고 먹거리가 풍족하며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남녀노소가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어부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며칠 지낸 뒤에 집으로 돌아온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실려있는 유토피아의 모습이다.
4. 하늘나라에는 신선이 먹는 천도(天桃)가 있었다. 전설적인 신선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먹은 동방삭은 삼천갑자년, 즉 18만년을 살았다한다. 또 서유기에는 손오공이 먹기만 하면 불로장생할 수 있는 천도 밭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있다가 어느 날 9천년에 한 번 열리는 열매를 몽땅 따먹어 버렸다. 그는 이 사건으로 나중에 삼장법사가 구해 줄 때까지 500년 동안 바위 틈에 갇히는 호된 시련을 겪게 된다.
이처럼 수많은 과일 중에 복숭아는 신선이 즐겨먹는 과일로 묘사되고 복숭아 숲은 신선사상과 이어져 유토피아의 대명사가 되었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술잔, 고려 때의 청자연적 및 주전자, 조선시대의 백자연적 등에는복숭아나무의 꽃, 잎, 열매가 그려져 있는 것이 많다.
5.고려 인종 원년(1123년) 송나라의 서긍이 사신으로 왔다가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의 귀족들은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하였으며 피부를 희게 하려고 복숭아꽃 물이나 난초 삶은 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민속으로는 특히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나뭇가지가 잡스러운 귀신들을 쫓아내는 구실을 한다고 믿고 있었다. 무당이 살풀이할 때는 복숭아 나뭇가지로 활을 만들어 화살에 메밀떡을 꽂아 밖으로 쏘면서 주문을 외기도 한다.
6. 세종 2년(1420년) 어머니인 원경왕후가 위독해지자 '임금이 직접 복숭아 가지를 잡고 지성으로 종일토록 기도하였으나 별 효험이 없었다'하며, 연산 12년(1505년)에는 '해마다 봄.가을의 역질 귀신을 쫓을 때에는 복숭아나무로 만든 칼과 판자를 쓰게 하라'하여 왕실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복숭아나무는 귀신을 물리치는 나무였다. 그래서 제사를 모셔야 하는 사당이 나 집 안에는 복숭아나무를 심지 않으며 제상의 과일에도 절대로 복숭아를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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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행
아... 저도 궁금했었는데요~ 이해가 가네요~ ^^
14 년전 -
청일
감사합니다...이제야 속이 시원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14 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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