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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깨달음을 위한 좌선법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0.07.10
첨부파일0
추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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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367
내용
보권좌선의(普勤坐禪儀)
도오겐 선사의 좌선의

무릇 참된 도(道)는 본래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모든 것에 통달하고 있다. 수행(修行)에 의해서 얻어지는 실증(實證)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모두가 추구하는 진실(眞實)은 자유자재한 것으로 우리들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 진실의 전체는 미혹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보리(菩提)를 거울에 비유하고, 번뇌(煩惱)를 티끌(塵)에 비유하여 항상 닦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모두가 진실이므로 닦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진실은 지금 당장 이 사실을 떠난 문제가 아닌데 어찌하여 수행(修行)이나 하면서 여기저기를 방황할 필요가 있겠는가.

티끌만큼의 심득의 차이가 있어도 결과는 하늘과 땅의 격차가 생긴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싫다 하는 분별(分別)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일어나면 엉망진창이 되어 전체의 진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가령 법(法)을 회득하여 잘난 체하고, 깨우침이 충만하여 언뜻 보아도 모든 것을 간파할 정도의 지혜가 있고, 도를 얻어 자기의 정체(正體)를 밝히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불법에 머리를 처넣고 돌아다닌다 하여도, 부처님(佛)이나 법(法)에 얽매이지 않고 생생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데 비하면 얼마나 잘못된 일이겠는가.

더구나 저 기원정사(祇園精舍)의 석가여래는 출생하면서 지견(知見)이 트인 분인데도 성도(成道)까지에는 6년간이나 단좌(端坐)의 수행을 하였으며, 그가 수행했던 자취는 지금도 볼 수 있다. 달마대사(達磨大師)는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한 사람으로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좌선(面壁坐禪)한 그의 명성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옛 불조(佛祖)마저도 이와 같이 수행을 하였던 것이다. 현세에 사는 우리들이 어찌 이와 같은 수행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유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언어에 집착하여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밖을 향하여 사물을 추구하겠다는 마음의 작용을 돌려, 자기의 정체(正體)를 밝혀주는 좌선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심신(心身)이 자연의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어 본래의 모습이 바로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진실을 추구하려는 생각으로 지체없이 진실의 수행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참선 즉, 좌선하기에는 조용한 실내가 적당하다. 음식은 절도를 지키고, 모든 관계를 떨쳐버려 만사를 중지한다. 선(善)도 악(惡)도 생각하지 말고, 시비(是非)의 분별에서 벗어나 마음과 의식의 작용을 정지하며, 마음과 생각 그리고 관찰에서 이것저것 헤아리지 말 것이다. 또한 좌선하여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도 버려라. 좌선은 행주좌와(行住坐臥)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정식으로 좌선하는 곳에는 두터운 요를 깔고 그 위에 방석을 놓고 앉는다. 좌법(坐法)은 결가부좌(結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취한다. 상세히 말하면 결가부좌는 우선 우측 발을 좌측 허벅다리 위에 놓고, 좌측 발을 우측 허벅다리 위에 놓는다. 반가부좌는 오직 좌측 발로 우측 허벅다리를 누르는 것처럼 포갠다.
의복과 허리띠는 느슨하게 하고 단정하게 한다.

다음에 우측 손을 좌측 발 위에 놓고, 좌측 손바닥을 우측 손바닥 위에 놓는다. 양손의 엄지손가락은 손톱 끝 쪽으로 서로 맞대어 붙인다.

그리고 자세를 바르게 하여 단정히 앉는다. 좌측으로 쏠리거나, 우측으로 기울거나, 앞으로 굽히거나, 뒤로 젖히지 않도록 한다. 옆으로는 귀와 어깨가 수직선상에 있고, 앞으로는 코와 배꼽이 수직선상에 놓는다. 그리고 혀는 위턱에 붙이고, 입술과 이는 상하로 꼭 다물고, 눈은 항시 뜨며, 코로 조용히 호흡한다.

신체의 자세가 조절되면 입으로 들이마셔 입으로 토하는 심호흡으로 한숨 돌리고 등골을 축으로 하여 좌우로 몸을 흔들어 움직인 다음, 조용히 앉아 명상에 잠긴다. 명상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세계의 생각을 떨쳐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즉 좌선의 중요한 요건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좌선은 선정(禪定)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고 다만 본래 정착해야 할 곳에 정착하는 안락의 가르침이며, 깨달음(진실의 길)을 철저히 규명하는 수행이며, 그 실증(實證)이다. 공안(公案) - 절대평등의 진실은 그대로 나타나며, 그물과 우리 속에 처넣어 속박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 뜻에 따라 좌선하면 용이 물을 얻은 것과 같고, 호랑이가 산을 끼고 웅크리고 있는 것과 같다. 이 때 틀림없이 알게되며, 정법(正法)은 그 자신의 목전에 나타나서 모든 시름과 마음의 산만은 사라지는 것이다.

좌선에서 일어날 때에는 서서히 몸을 움직여, 침착하게 천천히 일어선다. 갑작스럽고 거칠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돌이켜 범부(凡夫)냐, 부처냐 하는 문제를 떠나서 좌선하고, 일어서면서 일생을 마치는 것도 이 힘 하나에 달려 있었다.

나아가 지두(指頭), 간두(竿頭)에서 서서 의해서 혹은 침을 놓고, 망치로 쳐서 진실을 깨닫게 하는 전기를 만들고, 혹은 불자(拂子)나 주먹을 휘두르고, 막대기로 치며, 큰 소리로 꾸짖어 진실로 이끈 조사들의 공적은 인간의 생각과 분별판단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뭐라 해도 신통력과 수행의 결과인 실증(實證)으로서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상대(相對)의 세계를 초월한 몸이 본연의 자세이며, 지각이나 분별 이전의 불변의 법칙이다.

이러한 것이기 때문에 지혜가 있든, 어리석든 문제 삼지 않고,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차별해서도 안 된다. 전력을 다하여 꾸준히 진실한 도에 노력하여야 한다. 진실의 수행과 그 실증으로서의 깨달음은 그 자신이 조금도 의식상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향하는 곳은 당연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뿐이다.

대체로 이 세계에서나 저 세계에서도, 서천(西天) 인도에서나 중국에서도 조금도 차별 없이 불인(佛印)을 몸에 지니고 좌선종(坐禪宗)의 종풍(宗風)을 한결같이 행하고 있는 불법자(佛法者)는 오직 좌선을 묵묵히 이행하는 이외는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은 각지 천차만별일지라도 오직 좌선하여 진실의 도에 다가서는 것이다. 자기의 진실을 그대로 두고, 자기 집의 앉은 곳을 떠나서 공허하게 타국의 먼지투성인 땅을 오고 갈 필요가 있는가.

만약 한 걸음 잘못 디디면 그 곳에서 대도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사람의 몸에는 부처님(佛)의 작용을 지니고 있다. 어찌 공허하게 허송세월을 보낼 수 있겠는가. 돌을 치면 반짝하는 불과 같이 순간적으로 소멸되는 세월을 누가 공허하게 즐기고만 있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육체는 초로(草露)와 같고, 공허하며, 한 순간에 소멸되는 것이다.

원하건대, 참선 수행자들이여! 긴 세월동안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작거리듯이 불법을 자기의 지혜로 이해하려고 하지는 말아라. 그림의 용과 조각한 용을 사랑하듯이 문자상의 불법을 즐겨서는 안 된다. 진짜 용과 만나 그것을 인식할 수 없으면 소용없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사실을 가리키는 도를 향하여 정진하며 그 이상 수행할 여지가 없는 제불(諸佛)의 견성(見性)과 일치하도록 제조(諸祖)의 바른 좌선의 전통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꾸준히 이와 같이 수행하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자기 집의 보물창고(寶藏)는 자신이 열고 자기에게 주어진 진실로 살아가면 자유자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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