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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 연기(緣起)의 진리
연기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인데 우주 만유를 통하는 법칙이다. 파리(Pali)어의 원어에서 볼 때, ‘조건에 의한 발생’이라는 의미의 말이다. 이것을 ‘연기(緣起)’, 즉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뜻으로 번역한 것이다. 모든 법(法)은 서로 인(因)이 되고 서로 연(緣)이 되어 생기(生起)한다는 것이다.
아함경에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곧 법(法)을 보며, 법을 보는 자는 곧 연기를 보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법이라는 것은 곧 진리를 의미하는 것이요, 또 진리는 곧 연기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연기라는 진리는 불교의 근본적인 사상이요, 불교특유의 사상이다.
모든 법(法)은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생기는데, 다만 원인만으로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因)을 과(果)하게끔 하는 연(緣)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인과 연이 화합하여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으로 인은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연은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 따라서 불교에서 모든 존재의 생성과정을 인연소생(因緣所生) 또는 인연생기(因緣起]라고 한다.
잡아함경에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此起故彼起]”라 하여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하고 돕는[相依相資] 상호관련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므로 그 어느 한 가지도 고립되어 독자적으로 항상 존재하는 절대적인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라는 말은 존재의 공간적 관계의 설명이며,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라는 말은 생멸(生滅)의 시간적 관계에 대한 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삼법인(三法印)에서 현상계(現象界)의 모든 법(法)은 시간적으로 무상(無常)하고 공간적으로는 무아(無我)한 것이라는 것을 살펴 보았는데, 어째서 무상, 무아인가를 밝혀주는 것이 바로 이 연기(緣起)의 원리이다. 다시 말하면 현상계의 모든 법이 시간적으로 영원할 수 없고, 또 공간적으로 어떠한 실체성도 없는 이유가 연기의 원리에 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불타(佛陀)로서의 석존이 보리수 아래에서 크게 깨달았다고 할 때, 그 깨달은 내용이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연기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여타의 교리는 모두 이 연기의 진리에 직접·간접으로 근거할 뿐 아니라 후세에 발달한 대승불교의 교리도 이 진리의 전개인 것이다. 이러한 연기의 구체적인 표현방식이 바로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이다.
(2) 십이연기(十二緣起)
일체의 모든 존재는 한 순간의 정지도 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삼법인 중의 일체무아)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게 무상하게 변하며 바뀌어 가지만 그런 현상이 아무렇게나 행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 속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 그에 입각해 모든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무상하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무상한 것 속에 상주(常住)하는 법칙의 존재야말로 더욱 중요한 사실이라 하겠다.
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인간과 세계 사이에는 인과 관계가, 사물의 생멸 변화에는 인연화합(因緣和合)의 조건이,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 이룩된다.
현상은 무상하여 언제나 생멸변화하지만 그것은 일정한 궤도 안에서 일정한 움직임을 하고 있다. 그 움직임의 법칙을 인연이라 한다. 인연은 인연생기(因緣生起)를 줄인 말로서 연기(緣起)라고도 하며 잡아함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본 공식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써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멸한다.
연기법은 불교의 중심 사상이며 동시에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 즉 죽음의 문제, 삶의 가치 등에 관한 문제가 자신의 무지에서 비롯됐음을 해명해 주고 있다.
이 연기법은 원시 경전에는 여러 지(支)의 설이 있으나 그 중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십이지로 된 12연기, 즉 12인연법이다. 이 12인연은 12가지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12지연기(支緣起)라고도 한다.
① 무명(無明)
무명은 명(明)이 아닌 것[非明], 실재(實在)가 아닌 것, 또는 실재성(實在性)이 없는 것을 자기의 실체(實體)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말한다. 즉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불여실지견(不如實智見)을 말한다.
주어진 존재의 일시적 형체를 ‘나’로 집착하거나 연기의 이치를 모르는 것, 즉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근본 사상으로서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통하지 않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 무명으로 인하여 인생의 온갖 고뇌와 불행이 생기는 것이다.
② 행(行)
이러한 무명(無明)이 있으면 그것을 연(緣)하여 행(行)이 있게 된다. 행은 ‘결합하는 작용’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제화하려는 작용을 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행은 그릇된 행위 뿐 아니라 그 행위의 여력으로서의 습관력도 포함된다. 이른바 업(業)이 지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 경험은 어떠한 것이라도 그대로 소멸하지 않고 반드시 그 여력을 남기며 그것은 지능이나 성격 등의 소질로서 보존·축적되기 때문이다.
③ 식(識)
행(行)에 의해 개체가 형성되면, 그곳에 식이 발생한다. 식은 식별(識別)한다는 뜻을 가진 말이며, 개체(個體)가 형성되자 그곳에 분별(分別)하는 의식이 발생하게 된다. 분별하는 인식작용을 말한다.
④ 명색(名色)
식(識)을 연하여 명색이 일어나는데, 색(色)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키고 명(名)은 비물질적(非物質的)인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명색의 발생은 물질적인 것[육체]과 비물질적인 것[정신]이 결합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인식작용에 의해 일체의 존재가 현상적으로 나타남을 말한다.
⑤ 육처(六處)
이렇게 명색이 있게 되면 그것을 연하여 6처(六處)가 일어난다. 육처는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의지[意]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을 말하는 것으로 육근(六根)이라고도 한다. 다시 말하면 시각·청각·취각·미각·감촉·지각의 기능이 발생하는 것이다.
⑥ 촉(觸)
6처(六處)를 연하여 촉(觸)이 있게 되는데, 촉은 ‘접촉(接觸)한다’, ‘충돌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육근, 육경의 12처(十二處)에 6식[눈·귀·코·혀·몸·의지]에 발생한 식(識), 즉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이 화합하는 것이 촉이다. 감각과 지각에 의한 인식조건이 성립되는 것을 뜻한다.
⑦ 수(受)
촉에 연하여 수(受)가 발생한다. 수는 감수작용(感受作用)이라고 볼 수 있는데, 괴로움, 즐거움, 그리고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不苦不樂] 중간 느낌[捨]의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접촉(接觸)에 따른 필연적인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⑧ 애(愛)
수를 연하여 애(愛)가 발생한다. 끝없는 갈애(渴愛)를 뜻한다. 세 가지 느낌 중에서 즐거움의 대상을 추구하는 맹목적인 욕심이다.
⑨ 취(取)
애를 연한 취(取)는 취득(取得)하여 병합(倂合)하는 작용이다. 애에 의하여 추구된 대상을 자기 소유화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⑩ 유(有)
취를 연하여 유(有)가 발생한다. 유라는 말은 ‘있다’, ‘된다’는 두 가지 뜻이 있는 말이다. 생사(生死)하는 존재 그 자체가 형성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⑪ 생(生)
유에 연하여 (生)이 발생하는데, 생은 말 그대로 ‘생한다’라는 뜻이다 모든 존재의 출생을 의미한다.
⑫ 노사(老死)
생이 있으므로 노사(老死)가 있게 된다. 생과 사는 육체적 생사(生死)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생사한다고 보는 꿈과 같은 환상과 거기에서 오는 정신적인 괴로움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노사 다음에 우(憂)·비(悲)·고(苦)·뇌(惱), 즉 근심·슬픔·괴로움·번뇌가 따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십이인연은 우리 인간이 의존적 생성체로서 연기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위에서 ①~②, 즉 무명과 행은 과거를 나타내고, ⑪~⑫, 즉 생과 노사는 미래를 나타내며, 나머지 ③~⑩이 현재의 삶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십이연기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뜻은 무엇인가? 모든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 다시 말하면 죽음의 문제나 삶의 가치 등에 관한 문제를 해명해 주는 데에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십이연기설은 우리에게 인간의 죽음은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無知)에서 연기(緣起)된 것임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죽음이 신의 노여움에 의한 것이라든가, 숙명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든가, 또는 본래부터 그렇게 있도록 된 우연한 것이라면 인간 실존은 절망 속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그것을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의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생사의 괴로움 속에서 현실적으로 죄악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떻게 신의 은총을 바랄 수 있을까 ? 그러니까 신의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하겠지만, 구원의 확실성을 우리는 또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
그러나 부처님은 오랜 각고의 구도(求道) 끝에 마침내 인간의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無知)에서 연기한 것임을 발견한 것이다. 세계의 어떠한 종교가 부처님의 이런 깨달음보다도 더 밝은 전망을 인류에게 비춰줄 수 있을까 ! 연기의 깨달음이야말로 인류의 종교적 사색이 도달한 최고의 성과이다.
불교의 종교적 사색은 현실[생사의 문제]의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심화되고 있어, 신이나 우주의 원리로부터 설해 내려오는 권위주의적 종교와는 전혀 방향이 다르다.
십이연기를 노사(老死)에서 무명(無明)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역관(逆觀)은 불교의 이러한 추리적 사색의 방향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무명에서 노·사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순관(順觀)은 깨달음에 입각해서 생사(生死)의 발전과정을 밝혀주는 설명적 교설인 것이다.
십이연기설이야말로 가장 심오한 법문이며, 깨달음의 내용이며, 여러 교리를 하나로 종합·체계화한 것이며, 독특한 불교적 입장에 대한 최승(最勝)의 이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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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기(緣起)의 진리
연기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인데 우주 만유를 통하는 법칙이다. 파리(Pali)어의 원어에서 볼 때, ‘조건에 의한 발생’이라는 의미의 말이다. 이것을 ‘연기(緣起)’, 즉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뜻으로 번역한 것이다. 모든 법(法)은 서로 인(因)이 되고 서로 연(緣)이 되어 생기(生起)한다는 것이다.
아함경에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곧 법(法)을 보며, 법을 보는 자는 곧 연기를 보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법이라는 것은 곧 진리를 의미하는 것이요, 또 진리는 곧 연기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연기라는 진리는 불교의 근본적인 사상이요, 불교특유의 사상이다.
모든 법(法)은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생기는데, 다만 원인만으로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因)을 과(果)하게끔 하는 연(緣)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인과 연이 화합하여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으로 인은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연은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 따라서 불교에서 모든 존재의 생성과정을 인연소생(因緣所生) 또는 인연생기(因緣起]라고 한다.
잡아함경에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此起故彼起]”라 하여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하고 돕는[相依相資] 상호관련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므로 그 어느 한 가지도 고립되어 독자적으로 항상 존재하는 절대적인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라는 말은 존재의 공간적 관계의 설명이며,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라는 말은 생멸(生滅)의 시간적 관계에 대한 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삼법인(三法印)에서 현상계(現象界)의 모든 법(法)은 시간적으로 무상(無常)하고 공간적으로는 무아(無我)한 것이라는 것을 살펴 보았는데, 어째서 무상, 무아인가를 밝혀주는 것이 바로 이 연기(緣起)의 원리이다. 다시 말하면 현상계의 모든 법이 시간적으로 영원할 수 없고, 또 공간적으로 어떠한 실체성도 없는 이유가 연기의 원리에 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불타(佛陀)로서의 석존이 보리수 아래에서 크게 깨달았다고 할 때, 그 깨달은 내용이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연기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여타의 교리는 모두 이 연기의 진리에 직접·간접으로 근거할 뿐 아니라 후세에 발달한 대승불교의 교리도 이 진리의 전개인 것이다. 이러한 연기의 구체적인 표현방식이 바로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이다.
(2) 십이연기(十二緣起)
일체의 모든 존재는 한 순간의 정지도 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삼법인 중의 일체무아)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게 무상하게 변하며 바뀌어 가지만 그런 현상이 아무렇게나 행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 속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 그에 입각해 모든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무상하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무상한 것 속에 상주(常住)하는 법칙의 존재야말로 더욱 중요한 사실이라 하겠다.
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인간과 세계 사이에는 인과 관계가, 사물의 생멸 변화에는 인연화합(因緣和合)의 조건이,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 이룩된다.
현상은 무상하여 언제나 생멸변화하지만 그것은 일정한 궤도 안에서 일정한 움직임을 하고 있다. 그 움직임의 법칙을 인연이라 한다. 인연은 인연생기(因緣生起)를 줄인 말로서 연기(緣起)라고도 하며 잡아함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본 공식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써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멸한다.
연기법은 불교의 중심 사상이며 동시에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 즉 죽음의 문제, 삶의 가치 등에 관한 문제가 자신의 무지에서 비롯됐음을 해명해 주고 있다.
이 연기법은 원시 경전에는 여러 지(支)의 설이 있으나 그 중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십이지로 된 12연기, 즉 12인연법이다. 이 12인연은 12가지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12지연기(支緣起)라고도 한다.
① 무명(無明)
무명은 명(明)이 아닌 것[非明], 실재(實在)가 아닌 것, 또는 실재성(實在性)이 없는 것을 자기의 실체(實體)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말한다. 즉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불여실지견(不如實智見)을 말한다.
주어진 존재의 일시적 형체를 ‘나’로 집착하거나 연기의 이치를 모르는 것, 즉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근본 사상으로서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통하지 않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 무명으로 인하여 인생의 온갖 고뇌와 불행이 생기는 것이다.
② 행(行)
이러한 무명(無明)이 있으면 그것을 연(緣)하여 행(行)이 있게 된다. 행은 ‘결합하는 작용’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제화하려는 작용을 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행은 그릇된 행위 뿐 아니라 그 행위의 여력으로서의 습관력도 포함된다. 이른바 업(業)이 지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 경험은 어떠한 것이라도 그대로 소멸하지 않고 반드시 그 여력을 남기며 그것은 지능이나 성격 등의 소질로서 보존·축적되기 때문이다.
③ 식(識)
행(行)에 의해 개체가 형성되면, 그곳에 식이 발생한다. 식은 식별(識別)한다는 뜻을 가진 말이며, 개체(個體)가 형성되자 그곳에 분별(分別)하는 의식이 발생하게 된다. 분별하는 인식작용을 말한다.
④ 명색(名色)
식(識)을 연하여 명색이 일어나는데, 색(色)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키고 명(名)은 비물질적(非物質的)인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명색의 발생은 물질적인 것[육체]과 비물질적인 것[정신]이 결합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인식작용에 의해 일체의 존재가 현상적으로 나타남을 말한다.
⑤ 육처(六處)
이렇게 명색이 있게 되면 그것을 연하여 6처(六處)가 일어난다. 육처는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의지[意]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을 말하는 것으로 육근(六根)이라고도 한다. 다시 말하면 시각·청각·취각·미각·감촉·지각의 기능이 발생하는 것이다.
⑥ 촉(觸)
6처(六處)를 연하여 촉(觸)이 있게 되는데, 촉은 ‘접촉(接觸)한다’, ‘충돌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육근, 육경의 12처(十二處)에 6식[눈·귀·코·혀·몸·의지]에 발생한 식(識), 즉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이 화합하는 것이 촉이다. 감각과 지각에 의한 인식조건이 성립되는 것을 뜻한다.
⑦ 수(受)
촉에 연하여 수(受)가 발생한다. 수는 감수작용(感受作用)이라고 볼 수 있는데, 괴로움, 즐거움, 그리고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不苦不樂] 중간 느낌[捨]의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접촉(接觸)에 따른 필연적인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⑧ 애(愛)
수를 연하여 애(愛)가 발생한다. 끝없는 갈애(渴愛)를 뜻한다. 세 가지 느낌 중에서 즐거움의 대상을 추구하는 맹목적인 욕심이다.
⑨ 취(取)
애를 연한 취(取)는 취득(取得)하여 병합(倂合)하는 작용이다. 애에 의하여 추구된 대상을 자기 소유화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⑩ 유(有)
취를 연하여 유(有)가 발생한다. 유라는 말은 ‘있다’, ‘된다’는 두 가지 뜻이 있는 말이다. 생사(生死)하는 존재 그 자체가 형성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⑪ 생(生)
유에 연하여 (生)이 발생하는데, 생은 말 그대로 ‘생한다’라는 뜻이다 모든 존재의 출생을 의미한다.
⑫ 노사(老死)
생이 있으므로 노사(老死)가 있게 된다. 생과 사는 육체적 생사(生死)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생사한다고 보는 꿈과 같은 환상과 거기에서 오는 정신적인 괴로움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노사 다음에 우(憂)·비(悲)·고(苦)·뇌(惱), 즉 근심·슬픔·괴로움·번뇌가 따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십이인연은 우리 인간이 의존적 생성체로서 연기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위에서 ①~②, 즉 무명과 행은 과거를 나타내고, ⑪~⑫, 즉 생과 노사는 미래를 나타내며, 나머지 ③~⑩이 현재의 삶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십이연기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뜻은 무엇인가? 모든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 다시 말하면 죽음의 문제나 삶의 가치 등에 관한 문제를 해명해 주는 데에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십이연기설은 우리에게 인간의 죽음은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無知)에서 연기(緣起)된 것임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죽음이 신의 노여움에 의한 것이라든가, 숙명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든가, 또는 본래부터 그렇게 있도록 된 우연한 것이라면 인간 실존은 절망 속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그것을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의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생사의 괴로움 속에서 현실적으로 죄악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떻게 신의 은총을 바랄 수 있을까 ? 그러니까 신의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하겠지만, 구원의 확실성을 우리는 또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
그러나 부처님은 오랜 각고의 구도(求道) 끝에 마침내 인간의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無知)에서 연기한 것임을 발견한 것이다. 세계의 어떠한 종교가 부처님의 이런 깨달음보다도 더 밝은 전망을 인류에게 비춰줄 수 있을까 ! 연기의 깨달음이야말로 인류의 종교적 사색이 도달한 최고의 성과이다.
불교의 종교적 사색은 현실[생사의 문제]의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심화되고 있어, 신이나 우주의 원리로부터 설해 내려오는 권위주의적 종교와는 전혀 방향이 다르다.
십이연기를 노사(老死)에서 무명(無明)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역관(逆觀)은 불교의 이러한 추리적 사색의 방향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무명에서 노·사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순관(順觀)은 깨달음에 입각해서 생사(生死)의 발전과정을 밝혀주는 설명적 교설인 것이다.
십이연기설이야말로 가장 심오한 법문이며, 깨달음의 내용이며, 여러 교리를 하나로 종합·체계화한 것이며, 독특한 불교적 입장에 대한 최승(最勝)의 이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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