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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신장상
탑이나 불전 외벽 등에서 볼 수 있는 십이지신상은 쥐.소.호랑이.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 등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으며 몸은 사람 형체다. 이것을 십이생초(十二生肖)라 부르기도 하는데, 십이생초의 먼 조상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천문 역법과 관련된 도상에서 찾아진다. 고대 바빌로니아에 우주와 천계의 운행을 나타내는 천계십이수환((天界十二獸環)이라는 것이 있다.
원을 중심에서 12등분하여 그것을 열 두 방위로 삼고, 각 방위마다 그에 상응하는 동물과 인물 등 열두 가지 형상을 순차적으로 배치해 놓았는데, 각 방위에 배정된 것은 보병.쌍어.백양.금우(金牛).쌍녀.게.사자.처녀.천칭.천갈.인마(人馬).마갈(摩) 등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천문 역법 도상이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더 대왕의 동정(東征) 시기를 즈음해 중국에 유입됐고, 중국에 전래된 중앙아시아 역법 도상이 중국식으로 재창조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동물로 대체된 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보는 십이생초다. 중국의 십이생초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시기는 삼국시대로 보고 있다.
불교에도 십이신장이 있고, 십이수(十二獸) 개념이 있다. 불교의 신장은 불법과 사찰을 수호하는 외호적인 성격과, 사찰을 청정도량으로 만드는 내호적인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신장 집단의 하나인 십이신장은 약사여래의 권속이다.
약사여래는 그의 곁에 항상 십이신장을 거느리고 중생을 제도하는데, 질병과 재난을 면하게 해주고 의식주 여건이 부족한 이들에겐 그것을 충분히 마련해주며, 백성을 억압하는 폭군이나 외국의 침략군까지도 물리쳐 안심하고 살수 있도록 해준다고 한다.
십이신장은 그 역할과 기능이 약사여래의 명을 받아 약사여래 12대원을 성취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서민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한편 〈대방등대집경〉에 의하면, 사람들이 사는 섬 염부제는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데 남쪽 바다에 유리산(瑠璃山), 서쪽바다에 파리산(頗璃山), 북쪽바다에 은산(銀山), 동쪽바다에 금산(金山)이 있다고 했다. 이 네 개의 섬에 각각 3종류씩 모두 12종의 동물이 살고 있는데, 유리산에는 뱀.말.양, 파리산에는 원숭이.새.개, 은산에는 쥐.소.호랑이, 금산에는 사자.용.토끼가 살고 있다.
각 짐승은 동굴 안에서 수신을 거듭하고 있으면서 밤낮 12시간.12일.12월에 나누어, 교대로 염부제에 나가 돌아다니며 교화를 계속한다고 설명했다. 돼지가 사자로 바뀌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오늘날의 십이지 동물의 구성과 대동소이하다. 불교의 12수는 수신과 교화를 수행하는 보살과 같은 성격을 가지있는데, 이를 미루어 불교 신장과 십이지동물과의 결합 가능성을 살필 수 있다.
불경에는 약사 12신장이 무기를 든 무장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실제로 그런 도상으로 표현된 약사 12신장상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에는 12지동물과 결합된 형태의 약사 12신상이 헤이안(平安)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졌고, 유물 또한 적지 않게 남아 있어서 십이지 사상과 약사여래 12신장과의 결합 양상을 확인하기 어렵지 않다. 이것을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그와 같은 유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물이 없어 내용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
신라시대 약사신앙은 약사여래의 주처인 동방유리광세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것이 사방불신앙으로 발전해면서 방위신앙과도 연관을 맺게 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방위신앙이 당시 신라 사회에 이미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 추이 속에서 방위적 성격을 가진 십이지는 자연스레 약사신장 신앙과 결합됐다.
사찰이나 불탑에서 볼 수 있는 수수인신(獸首人身)의 갑주무장 십이지신상은 십이지의 방위적 성격과 약사십이신장의 수호적 성격이 결합된 제3의 신장상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12지신앙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밀교 영향으로 호국적 성격을 지녔으나, 삼국통일 이후는 단순한 방위신으로서 신격이 변모해 갔다. 즉 탑을 만들 때 기단부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했는데, 경주 원원사지삼층석탑이 효시가 된다.
원원사지에는 현재 동탑과 서탑이 남아 있다. 보존상태가 좋은 동탑을 살펴보면, 상층기단 한 면에 3구씩 모두 12구의 십이지상이 새겨져 있는데, 평복 차림의 십이지동물이 정적인 분위기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소(牛)만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왼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다.
두 손을 앞가슴에 모은 공예(恭禮)의 자세를 취하고 있어 불법 수호신으로서의 십이지신상의 성격을 찾아 볼 수 있다. 원원사지탑 이후에는 십이지상이 탑의 하층 기단부에 새겨지는데, 구례 화엄사 서5층석탑과 안동 임하동 3층석탑, 영양 화천동 3층석탑, 예천 개심사지 5층석탑 등의 십이지신상에서 그런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화엄사 대웅전 앞 동.서로 서 있는 쌍탑 중 서탑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아래층 기단 각 면 안상(眼象) 속에 십이지신상을 방위에 따라 배치해 놓았는데, 마모가 심하고 돌이끼가 심해 확실한 형태를 가늠해 어렵다. 다만 뱀의 경우가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데, 형태는 수수인신의 갑주무장상으로 되어 있다.
각 십이지상은 기단석 측면의 좁은 공간에 조각해야하는 제약 때문인지 낮게 주저앉은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이 자세는 원원사지삼층석탑 십이지상의 경우와 비교되는 것으로 얼른 보면 도무상(跳舞像)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예를 영양 화천동 3층석탑에서도 볼 수 있다.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능지탑의 십이지신상은 무장상으로 되어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십이지신상을 새긴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있는 석재를 쌓아올린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의 탑은 경주 남산에 산재하고 있던 부재들을 모아 조성한 것이다. 능지탑의 무장십이지신상은 약사십이신장과 십이생초의 결합을 강력히 시사해 주는 귀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십이지신상은 탑뿐만 아니라 부도에도 새겨졌다. 울산시 학성동에 있는 태화사지 십이지상부도의 십이지신상이 그 예다. 태화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태화동 반탕골의 산비탈에 묻혀 있었던 부도인데 장방형의 수석과 종형의 탑신부로 된 간략한 조형이다. 태화사와 관련된 유물로는 이 부도하나 뿐이며 1962년에 발굴하여 일시 경상남도청(釜山)에 두었다가 다시 현 위치에 가지고 온 것이다.
십이지상은 모두 머리부분은 짐승으로 되어 있고 몸은 사람으로 양각(陽刻)한 것으로 감실 바로 밑에는 말상을 새겨놓았다. 태화사지 부도에 십이지상을 새긴 것도 능묘의 호석과 마찬가지로 십이지상이 각기 그 방위에서 주술적인 의 수호.보전을 위한다는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고려시대의 십이신장상 석탑 유례로서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개심사지에 있는 3층석탑이 있다. 하층기단 면석 각 면에 3구씩 안상을 조각하고 그 안에 십이지상을 1구씩 양각하였다. 수수인신(獸首人身)의 형태인데, 넓은 소매의 도포를 입고 앉은 자세에서 합장을 하고 있다. 1층기단 면석 각면을 3구의 안상을 마련하고 그 속에 십이지신상 1구씩 배치하는 형식은 화엄사서 5층석탑에서 이미 본 바 있다.
십이신장상의 - 불법의 수호도 중요하지만 - 최종목적은 중생을 향한 약사여래의 십이대원을 성취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데 있으므로 덕과 자비를 겸해야 한다. 십이지신상은 불법을 해치는 무리에 대해서는 항복을 받지만, 자비로운 마음으로 항복한 그들을 다시 소생시켜 불도(佛道)로 인도한다. 십이신장상의 이런 성격과 역할을 생각해 볼 때 우리 나라의 사찰 십이신장상의 분위기와 표정은 매우 적절하다.
앞에서 언급한 원원사지동 3층석탑, 영양화천동 3층석탑 등의 십이신장상을 보면 옷자락을 천인(天人)의 천의(天衣)와도 같이 머리 위로 흩날리듯 표현함으로써 마치 불교의 범종에서 볼 수 있는 비천상을 연상케 한다. 이런 모습은 노골적인 분노형을 취하고 있어 섬뜩한 느낌을 주는 일본이나 중국의 신장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를 전해준다.
*사자
부처님의 위엄은 백수의 왕인 사자에 곧잘 비유된다. 사자는 네발 달린 짐승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존재로 두려움이 없고 모든 동물을 능히 조복시키는 위엄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도 이와 같아 불법을 비난하고 헐뜯는 자들을 포함해 모두를 조복시키기에 ‘인사자(人獅子)’로 불린다. 부처님 설법을 사자후라고 하는 것은 설법하는 모습이 당당하고 두려움이 없으며, 강설하는 음성이 사자가 포효(咆哮)하는 것처럼 우렁차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자리를 사자좌라 하는 것도 부처님이 사람 중의 사자가 되므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제왕의 자리를 용좌라 하는 것과 같다. 불교미술에 사자가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3세기 경이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은 부처님을 흠모하여 그의 뜻을 기리고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해 불적지(佛蹟址)를 돌며 탑과 기념주를 건립했는데, 현존하는 것이 30여기에 달한다.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석주를 보면 기둥 정상에 겹으로 된 연꽃 대좌가 있고, 그 위에 세 마리 사자가 등을 서로 맞붙인 채 앉아 있다.
우리나라 사찰 사자상의 양식이 아쇼카석주의 사자상과 어떤 영향관계가 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상징적 의미에 있어 아쇼카석주의 사자상과 유사한 점이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묘법연화경〉 ‘견보탑품’에 “석가모니불께서 오른 손가락으로 일곱 보탑의 문을 여시니, 큰 성문의 자물쇠가 풀리는 것과 같이 큰 소리가 났다. 그 때 거기 모인 모든 대중들은 보배탑 안 사자좌에 산란치 않으시고 선정에 드신 다보여래를 보며, 그의 음성을 들었다”라고 한 데서 우리는 사자좌의 개념을 살필 수 있다.
불국사 다보탑 위에 올라 앉은 사자상이 다보여래의 사자좌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석가탑이 석가여래를 상징하는 것처럼 다보탑이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것이고, 구조와 형태도 ‘견보탑품’에서 다보탑을 묘사한 내용과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다보탑 위에는 1902년 무렵까지만 해도 네 마리의 사자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세 마리를 훔쳐간 뒤로 지금은 한 마리만이 외롭게 탑을 지키고 있다.
다보탑의 것과 형태가 비슷한 사자상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의성 관덕동 석사자’로 불리는 이 사자상은 자세나 형태가 다보탑의 것과 흡사하여 또 하나의 사자탑이 의성지방에 존재했음을 증명해 준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자상이 있다. 목덜미에 갈기가 표현 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데, 이는 암수를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앉은 위치와 자세로 볼 때 불탑 수호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한편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 조성된 구례 화엄사의 4사자삼층석탑은 탑 위에 있던 사자상이 탑의 상층 기단을 받치는 부재로 변화한 예다. 사자탑은 하대석 네 모퉁이에 연꽃 대좌를 설치하고 그 위에 각각 한 마리씩의 사자를 앉혀 탑신을 받치도록 했다. 이형탑에 속하는 4사자 석탑은 외형은 물론이거니와 내포하고 있는 의미도 보통의 탑과 다르다.
네 마리 사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일을 벌린 정도가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미세한 입 모양의 변화 속에 불법의 깊고 오묘한 진리가 숨어 있다. 탑 중앙의 승상을 기준으로 할 때 앞의 오른쪽 것은 입을 가장 크게 벌리고 있고, 왼쪽 것은 중간 정도, 뒤의 오른쪽 것은 작게, 왼쪽 것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사자가 입을 가장 크게 벌린 것은 ‘A(아)’, 보통으로 벌린 것은 ‘U(우)’, 작게 벌린 것은 ‘M(훔)’ 발음의 표현이며,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M’ 발음 뒤에 따르는 침묵의 상태를 암시한다. ‘A’는 입을 여는 소리이며, ‘M’은 입을 닫는 소리로 일체의 언어와 음성이 모두 이 두자 사이로 돌아간다.
‘AUM(아훔)’ 혹은 ‘OM(옴)’의 신비스러운 발성은 고대 인도 베다의 찬미와 주문의 신성한 언어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그것은 창조의 완전성에 대한 표현의 의미로 해석된다. ‘A’는 경험과 함께하는 의식 상태이고, ‘U’는 꿈꾸는 의식 상태이며, ‘M’은 깊고 잠잠하고 분화되지 않은 의식 상태이다. ‘A’와 ‘U’와 ‘M’의 발음 뒤에 따르는 침묵은 궁극적인 신비의 세계이며, 법성(法性) 자체가 자아로서 체험되는 단계인 것이다.
화엄사 4사자삼층석탑에서 볼 수 있는 ‘아훔’의 신비로운 발성 표현은 같은 사찰 경내의 원통전 앞 사자석탑, 그리고 제천 사자빈신사지의 4사자삼층석탑에도 적용되어 있다. 이와 달리 한 쌍의 사자상을 조성할 경우에는 처음과 마지막의 두 단계만 표현하는 것이 원칙이다.
동래 범어사 대웅전 앞 계단의 사자상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는데,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입을 꾹 다문 모습이다. ‘아훔’의 발성 표현은 사자상뿐만 아니라 석굴암 금강역사상, 통도사 금강계단 석문(石門)의 신중상에도 적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밀교의 교의(敎義)와 깊은 관련이 있다. 정통 밀교사상은 실재(實在)와 현상, 처음과 끝을 자기의 한 몸에 융합하는 ‘즉신성불(卽身性佛)’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동남아의 불교 국가에서는 불전 앞에서 문지기 역할을 하고 있는 덩치가 크고 위엄 있는 사자상을 자주 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드문 경우지만 포항 보경사에서 불전을 지키는 사자상을 만나 볼 수가 있다. 대적광전 앞에 작고 귀여운 두 마리 사자가 배치되어 있는데, 전각 내에 비로자나불과 문수.보현보살이 모셔진 것을 감안하면 문수보살의 ‘탈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놓인 위치와 자세, 목에 달린 방울로 볼 때 불전 수호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벽사상이 분명하다. 옛 사람들은 금속성 소리가 귀신을 쫓는 영험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방울을 벽사용으로 사용했는데, 무당이 굿할 때 방울을 흔들거나 상여 기둥 끝에 방울을 매달아 소리 나게 하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사자는 석등에도 있다. 석등은 빛을 밝혀 진리를 찾는다는 불교적 사고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불전 앞이나 옥외의 일정한 곳에 설치돼 종교 의식의 예기(禮器)로 사용되어 왔다. 대표적인 석등 유적으로는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부도 앞 석등, 보은 법주사 쌍사자석등,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그리고 국립광주박물관 소장의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과 같은 것이 있다.
청룡사 보각국사부도 앞 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석등으로 하대석을 사자상으로 대신했으므로 사자석등으로 불린다. 법주사 쌍사자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석등으로, 널따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댄 채 뒷발로 아랫돌을 디디고,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합천 영암사지 석등은 아래받침돌에 연꽃모양이 조각되었고 그 위로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서 있다. 사자의 뒷발은 아래받침돌을 딛고 있으며, 앞발은 들어서 윗받침돌을 받들었다. 머리는 위로 향하고 갈퀴와 꼬리, 근육 등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은 원래 전라남도 광양시의 중흥산성 성 안의 절터에 있던 것이다.
이 석등은 간주석 부분이 쌍사자로 대치되어 있다. 두 마리 사자가 지붕과 화사석을 받들고 있는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뛰어난 조각기법과 우아한 조형미를 지닌 우리나라 석등의 대표적 걸작으로 평가된다. 석등의 간주석을 사자상으로 변형시킨 것은 사자가 용맹한 동물이므로 그 위력으로 진리의 빛을 수호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사찰 속에 존재하는 사자는 용(龍)처럼 신격을 가진 신중도 아니고, 연꽃처럼 불교적 상징형으로 대접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불국토와 부처님을 장엄하는 상징물이라는 점에서는 이들과 다를 것이 없다. 오히려 4사자탑의 사자와 같이 깊고 오묘한 교의(敎義)를 드러내는 상징형으로 존재하며 사찰 장식의 상징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하다.
사자상은 사자가 포효하며 일어날 때 다른 짐승 무리는 복종하고 사자 새끼는 용맹을 더하는 것처럼 부처님이 가진 그와 같은 권능과 위신력 자체를 상징하고 있을뿐더러, 사자빈신(獅子頻迅)의 기개로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외호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사자가 가진 일련의 이런 특징들은 불법수호의 기능만 강조되는 용이나 길상의 의미만 지닌 여타 동물들과 비교되는 점이라 하겠다.
*가릉빈가
부처님을 모신 수미단, 고승대덕의 부도 또는 와당 등에서 머리는 사람 형태이고 하반신은 날개, 발, 꼬리를 가진 불상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가릉빈가(迦陵頻伽)라고 하는 상상의 새다. 가릉빈가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년 전, 부처님이 왕사성 기원정사에서 사리불, 마하가섭 등 사부대중에게 설한 〈아미타경〉에 처음 등장한다.
부처님이 아미타 극락정토의 모습은 설하되, 그곳에는 흰 고니와 공작과 앵무와 사리조(舍利鳥)와 가릉빈가와 공명조(共命鳥, 한 몸뚱이에 두 개의 머리가 달린 새)와 같은 여러 새들이 밤낮으로 여섯 번에 걸쳐 아름답고 온화한 소리를 내는데, 이 새들은 모두 아미타불이 법음을 널리 펴기 위해 화현(化現)한 것이라 했다.
또한 그 국토의 중생들이 가릉빈가의 소리를 듣고 모두 부처님과 가르침을 생각하고, 스님들을 생각한다고 했다. 〈묘법연화경〉에는 부처님 음성을 가릉빈가 음성에 비유해 말했고, 후세 사람들은 가릉빈가를 미화하여 선조(仙鳥).호성조(好聲鳥).묘음조(妙音鳥).미음조(美音鳥).옥조(玉鳥)라고 불렀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의 사람들은 가릉빈가를 음악신 또는 음악의 창시자로 믿고 있는데, 인도 음악의 기원 전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도 고대 전설에 의하면, 설산(雪山, 히말라야산)에 신기한 새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무시카(Musikar)라고 불리는 악기를 연주하는데, 일곱 개 구멍 마다 각기 다른 소리가 나며, 계절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소리의 높낮이와 곡조의 조화가 미묘하여 환희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가릉빈가는 천년을 사는데, 수명을 다해 죽을 때가 되면 스스로 불을 피워 놓고 주위를 돌며 각종 악곡을 연주하며 열락의 춤을 춘다.
그러다 불 속에 뛰어 들어 타죽는다. 그러나 곧 따뜻한 재에서 한 개의 알이 생겨나 부화하여 과거의 환상적 생활을 계속하다가 또 불 속에 뛰어들어 타죽는다. 이렇게 하면서 생사의 순환을 계속한다. 환상적인 가릉빈가에 대한 전설은 대대로 전해져 지금도 인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가릉빈가가 갖추고 있는 인수조신(人首鳥身) 형태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인도 기원설, 그리스 기원설, 그리고 한대(漢代) 화상석에 보이는 우인(羽人. 날개가 있는 신선의 일종)기원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가릉빈가의 형태에 관한 한 다원발생적인 측면보다는 ‘동서문화의 교류와 융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서기 전 4세기 경, 알렉산더 대왕의 동정(東征) 길을 따라 인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파급된 그리스 문명은 현지 문명과 융합하여 제3의 문화를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간다라 미술이고 간다라 불상이다. ‘동서문화의 교류와 융합’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가릉빈가도 고대 인도신화 전설의 기초 위에, 그리스로마 신화 속의 천사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제3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 가릉빈가는 서역과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오늘날 사찰 곳곳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인수조신(人首鳥身) 형식의 문양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덕흥리고분, 안악1호분 등 고구려 고분벽화에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덕흥리 고분 천장에 그려져 있는 인수조신 형태의 새. 이 새 바로 옆에 ‘만세지상(萬歲之像)’이라고 쓴 명문이 보이는데, 이 내용은 인도 전설에서 가릉빈가가 천년을 산다고 한 것과 뜻을 같이 한다. 모양 또한 인수조신 형태로 묘사되어 있어 이 새가 가릉빈가임이 틀림없다. 같은 벽면에 신비로운 짐승들인 비어(飛魚),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새(청양), 불을 밟고 가는 불새도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새가 〈아미타경〉에 나오는 공명조(共命鳥)가 아닌가 생각되고, ‘양광지조리화이행(陽光之鳥履火而行. 빛의 새, 불을 밟고 가다)’이라는 명문이 붙어 있는 새는 불사조인 것으로 보인다. 천계(天界)의 상징인 천장에 이처럼 신조(神鳥)와 천인과 함께 가릉빈가, 공명조 등 극락정토에 사는 새들을 그린 것은 무덤을 극락정토로 조성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 경우에는 부도나 와당에서 가릉빈가문양을 많이 볼 수 있다. 문양이 아름다운 것으로는 경주 반월성 터를 비롯해서 황룡사지, 창림사지 보문사지, 안압지 등에서 발견된 와당이 있다. 부도의 경우에는 쌍봉사철감선사탑과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의 가릉빈가가 유명하다.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의 가릉빈가문을 살펴보면, 상단 괴임대 8면에 각각 날개를 펼친 가릉빈가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다리와 날개의 표현이 섬세하고, 자세는 유연하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의 경우는 상대석 위에 있는 8면의 안상(眼象)을 가진 탑신괴임대 면에 주악상과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양 날개를 활짝 펴고 서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금방 날아오를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도식적인 느낌이 강하나 그것이 오히려 부도의 분위기를 정숙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조선시대 가릉빈가 조각상으로 주목되는 것은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의 서운사(棲雲寺) 대웅전 가릉빈가상이다. 내부 모서리 두공에 봉황과 함께 가릉빈가를 장식해 놓았는데, 가릉빈가의 도상적 특징이 매우 사실적이다. 목각 가릉빈가상을 법당 내부의 모서리 두공에 장식한 예를 중국 복건성 천주(泉州)의 개원사 대웅보전에서도 볼 수 있으나 한반도 남쪽의 절에서는 찾을 수 없다.
불단에 장식된 가릉빈가로는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의 것이 유명하다. 수미단은 전면과 좌우 측면에 각양각색의 신비스러운 문양들로 가득 차 있는데, 쌍을 이룬 물고기를 제외하면 모두 상상의 동물들이다. 당초(唐草)를 입에 물고 있는 귀면, 모란꽃 사이를 나는 봉황, 박쥐 날개를 단 익룡, 인두어신(人頭魚身)의 물고기, 자라껍질을 등에 진 괴인 등 기이하고 초현실적인 동물이 어울려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 중에 가릉빈가가 포함되어 있는데, 띠매듭을 맨 천의를 입고 박대(博帶)를 어깨 위로 휘날리며 연꽃 봉오리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가릉빈가는 악곡연주, 춤, 노래로서 부처님을 공양하거나 설법 장소를 상서롭고 아름답게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가릉빈가의 출현은 곧 경사스러운 전조(前兆)의 의미로 해석됐다. 기원정사에서 부처님께 공양하는 날마다 가릉빈가가 내려와 춤을 출 때, 묘음천(妙音天)이 가릉빈무(迦陵頻舞)라 일컫는 춤곡을 연주했다고 한 경의 내용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성자가 출현하거나 성군이 덕치(德治)를 펼쳐 천하가 태평할 때 봉황이 나타난다고 하는 동양 고래의 상서(祥瑞) 관념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능엄경〉, 〈정법연경〉, 〈대지도론〉 등에 나오는 가릉빈가에 관한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러하다. 가릉빈가는 그 소리가 시방세계에 두루 미치는데, 그 소리가 지극히 신묘하여 하늘과 사람과 음악신인 긴나라까지도 흉내 낼 수 없으며,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염증을 느끼지 않는다. 가릉빈가는 알 속에서 나오기 전에도 울음소리를 내는데, 그 울음소리는 여타 다른 새들의 어느 것보다 미묘하고 뛰어나다. 부처님의 음성은 마치 대범천왕의 것과 같고, 가릉빈가의 울음소리와 같이 아름답고 곱기 때문에 범음상이라고 한다.
가릉빈가의 불교적 의미는 형태가 아니라 이처럼 소리에 집중되어 있다.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이 청정 미묘한 범음으로 무상의 정법을 연출하니 듣는 사람들이 기뻐하여 맑고 오묘한 도리를 얻는다고 했다. 범음이란 대범천왕이 내는 음성으로, 음이 정직하고 조화롭고 우아하며, 음이 맑고 투철하고 깊고 풍족하며, 음이 두루 미처 멀리 들린다. 범음을 내는 가릉빈가는 부처님의 또 다른 화현(化現)에 다름 아니다.
사찰 도처에서 우리는 토끼와 거북이가 단독으로, 혹은 함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승주 선암사 원통전에는 방아 찧는 두 마리 토끼 가 있고, 김제 금산사 보제루에는 누운 자세로 건물 부재를 받치고 있는 한 쌍의 토끼가 있다.
남원 선원사 칠성각, 상주 남장사 극락보전, 양산 통도사 명부전에도 토끼와 거북이 형상을 그린 그림이 있으며, 여천 흥국사 대웅전 축대 위에는 돌을 깎아 만든 토끼와 거북이 상이 있다. 그리고 울진 불영사 대웅보전 석축 아래에는 덩치가 큰 두 마리의 거북이 상이 있다.
선암사, 금산사의 것은 토끼만 나타나 있는 경우이고 선원사, 남장사, 통도사, 흥국사의 것은 토끼와 거북이가 함께 등장한 경우며, 불영사의 것은 거북이만 나타나 있는 사례다. 선암사 원통전 출입문 궁창에 장식된 토끼상은 조각 솜씨가 뛰어나거나 아름답지는 않지만 지닌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단순한 토끼 문양이 아니라 토끼로써 달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예를 서울 창덕궁 대조전 뒷뜰의 굴뚝에서 찾을 수 있는데, 토끼로써 달을 표현하는 상징적 수법은 전통시대 장식 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이는 전설이나 민담을 통해 형성된 달에 대한 일반적 관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불교에서 보리심을 심월(心月)이라 하거나 만월에 비유하는 것은 밝고 깨끗하며, 광명을 천지에 두루 비추어도 분별됨이 없는 것이 보름달과 같기 때문이다. 관음보살의 화현(化現) 중에 달과 관련된 이름을 가진 보살로는 만월보살, 수월보살, 월광보살 등이 있는데, 보살에 달과 관련된 이름을 붙인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보름달의 기하학적 속성은 원이다. 둥근 원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점의 연속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원은 영원성과 상통한다. 또한 원은 크기의 대소를 불문하고 자체로써 완전성을 확보하고 있기에 불교의 원만(圓滿).원통(圓通).원공(圓空) 등의 개념과 통한다. 관음보살을 원통교주라고 하는 것은 관음보살이 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圓融通)을 갖추고 중생 고뇌를 소멸시켜 주기 때문이다.
관음보살의 원만.원통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이상적 상징형은 무어라 해도 보름달이다. 실제로 동래 범어사 관음전 벽면에는 커다란 보름달이 그려져 있다. 선암사 원통전 출입문의 토끼는 그냥 토끼가 아니라 보름달이다. 그것은 원통전의 주인인 원통교주가 보문시현(普門示現)을 통해 나타난 또 하나의 관음보살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들에게 친숙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혹은 〈별주부전〉은 인도의 불전설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불전설화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본생담을 말하는 것으로, 원왕본생(猿王本生), 악본생(鰐本生), 원본생(猿本生)의 세 가지가 있다. 이야기는 옛날 인도에서 교훈적인 우화로 전해 오다 불교 경전에 수용되면서 종교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설화에 등장하는 동물은 원숭이와 악어인데, 물에 사는 악어 아내가 원숭이 간을 먹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본생담에 삽입된 고대 인도설화가 불교전파와 함께 중국에 들어와 한문으로 번역될 때 악어와 원숭이가 거북이와 원숭이, 또는 용과 원숭이로 변했다. 그러나 설화가 지니는 불교적 의미는 같은 것이어서 설화 속의 원숭이는 부처님의 전신(前身)이며, 악어는 악인(惡人)인 제바달다(提婆達多, 부처님과 같은 시대의 이단자)로, 악어가 원숭이 간을 탐내는 것처럼 제바달다가 부처님을 해치려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 각색된 본생담이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주인공이 다시 토끼와 거북이로 변했다. 이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이 〈삼국사기〉 열전(列傳) 김유신전에 삽입된 ‘귀토설화(龜兎說話)’인데, 내용을 보면 이야기 주인공의 변화를 알 수 있다.
‘귀토설화’의 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통도사 명부전 내벽에 보인다. 토끼가 거북이 등에 올라타고 용궁을 향해 가는 장면을 그렸는데, 일행 앞에서 또 다른 거북이가 길을 안내하는 모습이 보이고, 날아갈 듯한 기와지붕 옆에 써놓은 ‘수궁(水宮)’이라는 글자가 토끼 일행의 목적지가 용궁임을 알려 준다. 남장사 극락전의 그림은 토끼와 거북이 일행이 육지를 막 떠나는 장면을 그렸다. 일행을 떠나보내는 또 한 마리의 토끼 모습이 이채롭다.
여천 흥국사 대웅전 축대에도 토끼, 거북이 조각이 있으며, 남원 선원사 칠성각에도 거북이와 토끼를 조각한 목조 장식물이 있다. 이와 달리 거북이 혼자 등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해남 미황사 대웅전 앞쪽 주춧돌, 선암사 불조전 천장, 울진 불영사 대웅전 석축 밑, 창녕 불곡사 일주문 위, 정읍 내장사 대웅전 현판 양쪽 등 여러 곳에서 그와 같은 예를 찾을 수 있다.
‘귀토설화’에서 육지를 떠난 토끼와 거북이가 향해 가는 목적지는 용궁(龍宮)이다. 용궁은 용왕의 신령스러운 능력으로 만든 곳으로서 불교에서는 대해(大海) 밑에 있는 또 하나의 불국정토로 관념화 되는 곳이기 하다. 불자들은 현세에 불법이 유행하지 않게 될 때에는 용왕이 용궁에서 경전을 수호한다고 믿고 있다. 용궁과 관련해 〈불설해용왕경(佛說海龍王經)〉 ‘청불품(請佛品)’에 이렇게 적혀 있다.
해용왕이 영취산에 나아가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신심이 환희하여 용궁에 오셔서 공양을 받으시도록 청하니 부처님이 허락했다. 용왕은 곧바로 대해에 들어가 조화를 부려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을 짓고 무량보주로 갖가지 장식을 하니 장엄이 비길 데가 없었다. 해변으로부터 바다 밑에 이르기까지 통로에 삼도보계(三道寶階)를 만드니 도리천으로부터 염부제에 내려올 적과 같았고, 부처님이 모든 비구.보살들과 함께 보배 계단을 밟고 용궁에 들어가 용왕을 위하여 대설법을 베풀었다.
용수(龍樹)보살 전설에도 용궁이 등장한다. 대승불교를 일으킨 인도의 용수보살이 설산(히말라야 산)에서 어떤 늙은 비구의 인도로 용궁에 들어가 많은 경전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 용수보살은 한없이 많은 〈화엄경〉 범본(梵本) 가운데서 하본(下本) 화엄경을 지상으로 가져왔고, 그 때 가져온 〈화엄경〉이 오늘날의 〈화엄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불자들에게 용궁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주었으며, 〈화엄경〉의 소장처가 용궁이 있는 바다와 관련이 있다는 관념도 심어 주었다. 이와 연결해 볼 때, 선암사 대웅전 처마의 착고판(부연과 부연 사이를 판자로 막은 부분)마다 묵서 ‘해(海)’자를 쓰고, 대웅전 옆 요사채의 판벽에 ‘해(海)’자와 ‘수(水)’자를 투각한 것은 대웅전 일대를 대해의 불국정토, 즉 용궁으로 상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추측되며, 양산 통도사에서 경전을 보관하는 전각 이름을 해장보각(海藏寶閣)이라 한 것도 불경의 보관처가 해저 용궁이라고 보는 관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회전식 불경 보관대인 윤장대로 유명한 용문사가 있는 곳이 용궁리(龍宮里)라는 것도 우연의 일치로 보아 넘기엔 시사하는 바가 너무 크다.
불자들의 관념 속에는 사바세계에서 피안(彼岸)의 정토로 건너 갈 때 타고 가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는 상상의 배가 있다. 관념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것이 반야용선도이며,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법당 앞 기둥과 추녀 밑의 용두이다. 서방 극락정토로 가는 탈 것이 반야용선이라면 동방 해중 용궁으로 가는 탈 것은 거북이가 될 수 있다.
울진 불영사 대웅보전 축대 밑에 돌로 만든 커다란 거북이상이 있는데, 계단 양쪽에 각 한 마리씩 두 마리가 마치 대웅보전을 등에 지고 어디론가를 향해 가는 듯이 보인다. 여천 흥국사 대웅전 축대 위의 거북이는 옆에 있는 토끼와 함께 대웅전 건물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위치와 자세로 볼 때 이 거북이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법당의 불자들을 인도하여 용궁이라는 이상세계로 가는 ‘반야귀선(般若龜船)’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한다.
*토끼와 거북이
거북이의 자세와 관련해 비석의 귀부(龜趺)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귀부는 경주 신라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처럼 완전한 거북이 형태로 된 것이 있는가 하면, 여주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의 귀부처럼 용머리에 거북이 몸의 형태로 된 것도 있다. 이들 귀부를 유심히 보면 앞을 향해 나아가는 자세를 취한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특히 청원 봉선홍경사비갈 귀부의 경우, 고개를 한 쪽으로 크게 돌린 자세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 틀림이 없다. 쌍봉사철감선사탑비 귀부 역시 앞발을 휘저으며 물 속을 헤엄쳐 나아가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귀부가 향해 가는 곳은 아마도 이상세계일 것이며, 그것은 동방 해중의 불국정토와 같은 곳이리라.
사찰 장식 미술 속의 토끼와 거북이는 가깝게는 ‘귀토설화’의 주인공이지만 설화의 원천을 따진다면 부처님의 본생담과 관련있는 동물이다. 바로 이점이 토끼와 거북이가 사찰 장식 미술의 소재로 수용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사찰 장식 미술의 소재로 수용된 토끼와 거북이는 때로 각기 독자적인 의미를 가진 상징물로 존재하기도 한다. 토끼는 달의 상징형으로, 거북이는 극락정토를 지상의 공간에 구현하는 상징형으로, 불자들을 대해의 용궁으로 인도하는 탈 것의 상징으로 거북이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호랑이
사찰의 불전 장식화 가운데 특별히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호랑이그림이다. 민간에서 많이 그려지는 호랑이그림이 사찰 장식 그림으로 활용되는 것도 흥미롭거니와 표현 방법과 내용이 민화와 다르지 않다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일반 민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까치와 호랑이를 그린 것, 호랑이 한 마리만 그린 그림,담배 피우는 호랑이를 그린 것,산신의 시자(侍者)로 앉아 있는호랑이를 그린 그림 등 내용도 다양하다.
어떤 사찰에는 부처님이 전생에 보살이었을 때 굶주려 죽게 된 호랑이 가족을 살리기 위해 몸을 보시했다는 본생담 내용이나 희방사 오누이탑 전설 등 호랑이에 얽힌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도 있다. 건물 장식용 호랑이 그림 중에서 볼만한 것은 양산 통도사 해장보각의 까치호랑이그림이다. 민화 까치호랑이그림의 전형(典型)을 그대로 따르는 이 그림은 까치가 소나무 가지에 앉아 호랑이에게 무언가 지저귀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보통의 까치호랑이그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소나무 가지에 앉은 까치가 호랑이 얼굴보다 낮은 위치에 그려져 있다는 것과 까치 두 마리가 나란히 앉아 있지 않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가로로 길게 생긴 공포(包) 벽에 그려야 했기 때문에 생겨난 불가피한 현상으로 보인다.
한문으로 호작도(虎鵲圖)라 불리는 까치호랑이그림은 민간에서 세화(歲畵, 새해맞이 그림)로 인기가 높았던 그림의 하나로 까치, 호랑이, 그리고 소나무를 기본 요소로 하고 있다. 때로 바위, 불로초, 난초 등이 곁들여 그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그림의 상징적 의미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까치가 한 마리일 경우도 있고 두 마리일 때도 있는데, 이것은 한쌍주의를 고집하고 있는 화조화의 경우와 다른 점이다. 민화 화조화에서 볼 수 있는 한 쌍의 새는 음양의 조화나 남녀 화합을 상징한다. 그러나 호작도의 까치는 그런 것과 상관이 없이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하는 전통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기쁨의 상징형으로 존재한다.
호작도의 화의(畵意)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몇 가지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서낭신의 사자(使者)인 까치가 호랑이에게 신탁(神託)을 전하는 내용이라는 주장도 있고, 약자의 상징인 까치가 강자의 상징인 호랑이를 조롱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런데 민화 소재의 경우, 발음의 유사성과 관련하여 특정한 의미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예컨대 징그러운 박쥐가 행복의 상징이 된 것은 편복(, 박쥐의 한자 말)의 ‘복()’이 ‘복(福)’과 발음이 같기 때문이고, 원숭이가 관계(官界) 등용을 상징하게 된 것은 ‘후()’가 제후(諸侯)의 ‘후(侯)’의 발음과 같기 때문이다.
호작도의 호랑이는 ‘보(報)’를 의미한다. 호작도의 전신(前身)이 까치표범그림인데, 표범은 ‘표(豹)’와 ‘보(報)’의 중국식 발음이 서로 같다는 이유로 ‘보답한다’는 의미를 얻은 것이다. 결국 까치호랑이그림은 세시를 맞이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을 호랑이와 까치를 매개체로 표현한 그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로 하여금 만면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호랑이 그림이 수원 팔달사 용화전 외벽에 있다. 이 벽화를 보는 사람은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과 ‘까마득해 종잡을 수 없는 옛날’을 생각해 낼 것이다. 팔달사 스님 말로는 약 100여년 전에 그려졌다고 하는데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은 편이다. ‘호랑이 담배피우는 그림’이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토끼가 호랑이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호랑이는 나름대로 위엄을 갖춘 자세를 취한 듯하나 얼굴 표정에 배어나는 어수룩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고, 담뱃불을 붙여주는 토끼는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밝고 요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혹자는 이 그림을 힘 있는 지배계급과 힘없는 피지배계급사이에 일어나는 갈등관계를 풍자한 그림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옛날 민화 화가들과 일반 서민들의 정서를 잘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단결일 뿐이다.
정통회화이거나 민화이거나 간에 한국 전통회화사에서 그림을 사회 풍자의 도구로 활용한 예는 없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 풍속화조차도 강자와 약자 간의 갈등이나 투쟁 같은 것을 풍자해서 그린 경우가 없었다.
우리의 옛 서민들은 서구의 사실주의 회화처럼 그림을 사회개혁이나 계몽 수단으로 활용할 줄도 몰랐고, 그런 일을 해낼 만큼 영악하거나 투쟁적이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던 아름다운 옛 이야기의 한 장면을 그려 집 안팎을 장식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절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그림을 말할 때 산신도를 빼놓을 수 없다. 산신도는 산신각에 단독으로 봉안되거나 칠성도, 독성도와 함께 삼성각(三聖閣)에 모셔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산신도는 선풍도골(仙風道骨) 풍의 노인이 호랑이를 옆에 거느리고 소나무 아래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호랑이의 표정에서 동물 왕으로서의 권위나 용맹성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산신은 원래 불교의 신중이 아닌 우리나라 고유의 토착신이며, 당초의 산신 신앙은 호랑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예(濊)조에 우리나라 풍습에 관해 “그 풍속은 산천을 존중한다. 산천에는 각기 부계(部界)가 있어서 함부로 서로 간섭할 수 없었다”는 내용과 함께 “호랑이에게 제사 드려서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고 적혀있다. 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원래 우리나라 산신신앙의 대상이 신격(神格)을 가진 호랑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산신도를 보면 호랑이가 ‘산신님’의 시종(侍從)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이런 현상은 자연신인 호랑이의 신격(神格)을 ‘산신님’으로 인격화하고, 주된 신앙의 대상을 ‘산신님’으로 삼게 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자연신인 호랑이, 호랑이의 신격이 의인화 된 산신, 그리고 우주목으로서의 소나무, 이 세 가지 기본 요소들로 구성된 산신도는 한국 전래의 산신신앙 체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호랑이를 단독으로 그린 그림은 까치호랑이그림이나 설화도에 비해 흔한 편이다. 양산 통도사 응진전.명부전, 부산 범어사 대웅전, 파주 보광사 대웅전, 울진 불영사 대웅보전의 호랑이그림을 비롯해서 많은 사찰 전각의 벽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배경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으나 까치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호작도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호랑이가 정면을 응시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은 벽사(邪)와 수호(守護)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최근에 새로 지은 절에서 대나무를 배경으로 한 호랑이 그림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벽사 기능을 가진 그림에 속한다.
파주 보광사 대웅전 후면 외벽의 호랑이 그림은 판벽에 그려져 있는데, 배경은 완전히 사라져버렸으나 흰 바탕에 검은 얼룩무늬 호랑이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다. 소나무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기 어려우나 서있는 자세는 범어사의 것과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보광사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영조 임금이 그의 모후인 숙빈 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재건한 것으로, 대응보전은 만세루, 관음전과 함께 그 시기에 지어졌다.
왕실의 원찰답게 건물 장식에 길상문양과 민화적인 요소가 풍부한데, 이 호랑이그림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이다. 건물 뒤편 벽에 그려져 있어서 일부러 찾아가 보지 않으면 그림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이런 후미진 곳에 호랑이그림을 그려 놓은 것은 당초의 목적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벽사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불전 장식 호랑이그림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세화(歲畵)의 성격을 가진 것이 있고, 민담이나 전설 속의 환상을 표현한 것이 있다. 또한 호랑이의 용맹성을 빌리는 벽사용 그림이 있고, 신앙의 대상이 된 호랑이그림이 있다.
이들 호랑이그림들은 불교적이라기보다는 서민적인 욕망과 정서를 담고 있으며, 표현 형식 또한 민화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주로 민간인들에 의해 요구되고 향유되던 호랑이그림이 이처럼 불전 장식용 그림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불교의 너그러운 포용력과 자신감 덕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탑이나 불전 외벽 등에서 볼 수 있는 십이지신상은 쥐.소.호랑이.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 등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으며 몸은 사람 형체다. 이것을 십이생초(十二生肖)라 부르기도 하는데, 십이생초의 먼 조상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천문 역법과 관련된 도상에서 찾아진다. 고대 바빌로니아에 우주와 천계의 운행을 나타내는 천계십이수환((天界十二獸環)이라는 것이 있다.
원을 중심에서 12등분하여 그것을 열 두 방위로 삼고, 각 방위마다 그에 상응하는 동물과 인물 등 열두 가지 형상을 순차적으로 배치해 놓았는데, 각 방위에 배정된 것은 보병.쌍어.백양.금우(金牛).쌍녀.게.사자.처녀.천칭.천갈.인마(人馬).마갈(摩) 등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천문 역법 도상이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더 대왕의 동정(東征) 시기를 즈음해 중국에 유입됐고, 중국에 전래된 중앙아시아 역법 도상이 중국식으로 재창조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동물로 대체된 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보는 십이생초다. 중국의 십이생초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시기는 삼국시대로 보고 있다.
불교에도 십이신장이 있고, 십이수(十二獸) 개념이 있다. 불교의 신장은 불법과 사찰을 수호하는 외호적인 성격과, 사찰을 청정도량으로 만드는 내호적인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신장 집단의 하나인 십이신장은 약사여래의 권속이다.
약사여래는 그의 곁에 항상 십이신장을 거느리고 중생을 제도하는데, 질병과 재난을 면하게 해주고 의식주 여건이 부족한 이들에겐 그것을 충분히 마련해주며, 백성을 억압하는 폭군이나 외국의 침략군까지도 물리쳐 안심하고 살수 있도록 해준다고 한다.
십이신장은 그 역할과 기능이 약사여래의 명을 받아 약사여래 12대원을 성취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서민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한편 〈대방등대집경〉에 의하면, 사람들이 사는 섬 염부제는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데 남쪽 바다에 유리산(瑠璃山), 서쪽바다에 파리산(頗璃山), 북쪽바다에 은산(銀山), 동쪽바다에 금산(金山)이 있다고 했다. 이 네 개의 섬에 각각 3종류씩 모두 12종의 동물이 살고 있는데, 유리산에는 뱀.말.양, 파리산에는 원숭이.새.개, 은산에는 쥐.소.호랑이, 금산에는 사자.용.토끼가 살고 있다.
각 짐승은 동굴 안에서 수신을 거듭하고 있으면서 밤낮 12시간.12일.12월에 나누어, 교대로 염부제에 나가 돌아다니며 교화를 계속한다고 설명했다. 돼지가 사자로 바뀌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오늘날의 십이지 동물의 구성과 대동소이하다. 불교의 12수는 수신과 교화를 수행하는 보살과 같은 성격을 가지있는데, 이를 미루어 불교 신장과 십이지동물과의 결합 가능성을 살필 수 있다.
불경에는 약사 12신장이 무기를 든 무장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실제로 그런 도상으로 표현된 약사 12신장상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에는 12지동물과 결합된 형태의 약사 12신상이 헤이안(平安)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졌고, 유물 또한 적지 않게 남아 있어서 십이지 사상과 약사여래 12신장과의 결합 양상을 확인하기 어렵지 않다. 이것을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그와 같은 유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물이 없어 내용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
신라시대 약사신앙은 약사여래의 주처인 동방유리광세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것이 사방불신앙으로 발전해면서 방위신앙과도 연관을 맺게 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방위신앙이 당시 신라 사회에 이미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 추이 속에서 방위적 성격을 가진 십이지는 자연스레 약사신장 신앙과 결합됐다.
사찰이나 불탑에서 볼 수 있는 수수인신(獸首人身)의 갑주무장 십이지신상은 십이지의 방위적 성격과 약사십이신장의 수호적 성격이 결합된 제3의 신장상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12지신앙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밀교 영향으로 호국적 성격을 지녔으나, 삼국통일 이후는 단순한 방위신으로서 신격이 변모해 갔다. 즉 탑을 만들 때 기단부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했는데, 경주 원원사지삼층석탑이 효시가 된다.
원원사지에는 현재 동탑과 서탑이 남아 있다. 보존상태가 좋은 동탑을 살펴보면, 상층기단 한 면에 3구씩 모두 12구의 십이지상이 새겨져 있는데, 평복 차림의 십이지동물이 정적인 분위기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소(牛)만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왼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다.
두 손을 앞가슴에 모은 공예(恭禮)의 자세를 취하고 있어 불법 수호신으로서의 십이지신상의 성격을 찾아 볼 수 있다. 원원사지탑 이후에는 십이지상이 탑의 하층 기단부에 새겨지는데, 구례 화엄사 서5층석탑과 안동 임하동 3층석탑, 영양 화천동 3층석탑, 예천 개심사지 5층석탑 등의 십이지신상에서 그런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화엄사 대웅전 앞 동.서로 서 있는 쌍탑 중 서탑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아래층 기단 각 면 안상(眼象) 속에 십이지신상을 방위에 따라 배치해 놓았는데, 마모가 심하고 돌이끼가 심해 확실한 형태를 가늠해 어렵다. 다만 뱀의 경우가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데, 형태는 수수인신의 갑주무장상으로 되어 있다.
각 십이지상은 기단석 측면의 좁은 공간에 조각해야하는 제약 때문인지 낮게 주저앉은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이 자세는 원원사지삼층석탑 십이지상의 경우와 비교되는 것으로 얼른 보면 도무상(跳舞像)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예를 영양 화천동 3층석탑에서도 볼 수 있다.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능지탑의 십이지신상은 무장상으로 되어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십이지신상을 새긴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있는 석재를 쌓아올린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의 탑은 경주 남산에 산재하고 있던 부재들을 모아 조성한 것이다. 능지탑의 무장십이지신상은 약사십이신장과 십이생초의 결합을 강력히 시사해 주는 귀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십이지신상은 탑뿐만 아니라 부도에도 새겨졌다. 울산시 학성동에 있는 태화사지 십이지상부도의 십이지신상이 그 예다. 태화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태화동 반탕골의 산비탈에 묻혀 있었던 부도인데 장방형의 수석과 종형의 탑신부로 된 간략한 조형이다. 태화사와 관련된 유물로는 이 부도하나 뿐이며 1962년에 발굴하여 일시 경상남도청(釜山)에 두었다가 다시 현 위치에 가지고 온 것이다.
십이지상은 모두 머리부분은 짐승으로 되어 있고 몸은 사람으로 양각(陽刻)한 것으로 감실 바로 밑에는 말상을 새겨놓았다. 태화사지 부도에 십이지상을 새긴 것도 능묘의 호석과 마찬가지로 십이지상이 각기 그 방위에서 주술적인 의 수호.보전을 위한다는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고려시대의 십이신장상 석탑 유례로서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개심사지에 있는 3층석탑이 있다. 하층기단 면석 각 면에 3구씩 안상을 조각하고 그 안에 십이지상을 1구씩 양각하였다. 수수인신(獸首人身)의 형태인데, 넓은 소매의 도포를 입고 앉은 자세에서 합장을 하고 있다. 1층기단 면석 각면을 3구의 안상을 마련하고 그 속에 십이지신상 1구씩 배치하는 형식은 화엄사서 5층석탑에서 이미 본 바 있다.
십이신장상의 - 불법의 수호도 중요하지만 - 최종목적은 중생을 향한 약사여래의 십이대원을 성취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데 있으므로 덕과 자비를 겸해야 한다. 십이지신상은 불법을 해치는 무리에 대해서는 항복을 받지만, 자비로운 마음으로 항복한 그들을 다시 소생시켜 불도(佛道)로 인도한다. 십이신장상의 이런 성격과 역할을 생각해 볼 때 우리 나라의 사찰 십이신장상의 분위기와 표정은 매우 적절하다.
앞에서 언급한 원원사지동 3층석탑, 영양화천동 3층석탑 등의 십이신장상을 보면 옷자락을 천인(天人)의 천의(天衣)와도 같이 머리 위로 흩날리듯 표현함으로써 마치 불교의 범종에서 볼 수 있는 비천상을 연상케 한다. 이런 모습은 노골적인 분노형을 취하고 있어 섬뜩한 느낌을 주는 일본이나 중국의 신장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를 전해준다.
*사자
부처님의 위엄은 백수의 왕인 사자에 곧잘 비유된다. 사자는 네발 달린 짐승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존재로 두려움이 없고 모든 동물을 능히 조복시키는 위엄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도 이와 같아 불법을 비난하고 헐뜯는 자들을 포함해 모두를 조복시키기에 ‘인사자(人獅子)’로 불린다. 부처님 설법을 사자후라고 하는 것은 설법하는 모습이 당당하고 두려움이 없으며, 강설하는 음성이 사자가 포효(咆哮)하는 것처럼 우렁차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자리를 사자좌라 하는 것도 부처님이 사람 중의 사자가 되므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제왕의 자리를 용좌라 하는 것과 같다. 불교미술에 사자가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3세기 경이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은 부처님을 흠모하여 그의 뜻을 기리고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해 불적지(佛蹟址)를 돌며 탑과 기념주를 건립했는데, 현존하는 것이 30여기에 달한다.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석주를 보면 기둥 정상에 겹으로 된 연꽃 대좌가 있고, 그 위에 세 마리 사자가 등을 서로 맞붙인 채 앉아 있다.
우리나라 사찰 사자상의 양식이 아쇼카석주의 사자상과 어떤 영향관계가 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상징적 의미에 있어 아쇼카석주의 사자상과 유사한 점이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묘법연화경〉 ‘견보탑품’에 “석가모니불께서 오른 손가락으로 일곱 보탑의 문을 여시니, 큰 성문의 자물쇠가 풀리는 것과 같이 큰 소리가 났다. 그 때 거기 모인 모든 대중들은 보배탑 안 사자좌에 산란치 않으시고 선정에 드신 다보여래를 보며, 그의 음성을 들었다”라고 한 데서 우리는 사자좌의 개념을 살필 수 있다.
불국사 다보탑 위에 올라 앉은 사자상이 다보여래의 사자좌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석가탑이 석가여래를 상징하는 것처럼 다보탑이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것이고, 구조와 형태도 ‘견보탑품’에서 다보탑을 묘사한 내용과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다보탑 위에는 1902년 무렵까지만 해도 네 마리의 사자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세 마리를 훔쳐간 뒤로 지금은 한 마리만이 외롭게 탑을 지키고 있다.
다보탑의 것과 형태가 비슷한 사자상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의성 관덕동 석사자’로 불리는 이 사자상은 자세나 형태가 다보탑의 것과 흡사하여 또 하나의 사자탑이 의성지방에 존재했음을 증명해 준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자상이 있다. 목덜미에 갈기가 표현 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데, 이는 암수를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앉은 위치와 자세로 볼 때 불탑 수호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한편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 조성된 구례 화엄사의 4사자삼층석탑은 탑 위에 있던 사자상이 탑의 상층 기단을 받치는 부재로 변화한 예다. 사자탑은 하대석 네 모퉁이에 연꽃 대좌를 설치하고 그 위에 각각 한 마리씩의 사자를 앉혀 탑신을 받치도록 했다. 이형탑에 속하는 4사자 석탑은 외형은 물론이거니와 내포하고 있는 의미도 보통의 탑과 다르다.
네 마리 사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일을 벌린 정도가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미세한 입 모양의 변화 속에 불법의 깊고 오묘한 진리가 숨어 있다. 탑 중앙의 승상을 기준으로 할 때 앞의 오른쪽 것은 입을 가장 크게 벌리고 있고, 왼쪽 것은 중간 정도, 뒤의 오른쪽 것은 작게, 왼쪽 것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사자가 입을 가장 크게 벌린 것은 ‘A(아)’, 보통으로 벌린 것은 ‘U(우)’, 작게 벌린 것은 ‘M(훔)’ 발음의 표현이며,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M’ 발음 뒤에 따르는 침묵의 상태를 암시한다. ‘A’는 입을 여는 소리이며, ‘M’은 입을 닫는 소리로 일체의 언어와 음성이 모두 이 두자 사이로 돌아간다.
‘AUM(아훔)’ 혹은 ‘OM(옴)’의 신비스러운 발성은 고대 인도 베다의 찬미와 주문의 신성한 언어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그것은 창조의 완전성에 대한 표현의 의미로 해석된다. ‘A’는 경험과 함께하는 의식 상태이고, ‘U’는 꿈꾸는 의식 상태이며, ‘M’은 깊고 잠잠하고 분화되지 않은 의식 상태이다. ‘A’와 ‘U’와 ‘M’의 발음 뒤에 따르는 침묵은 궁극적인 신비의 세계이며, 법성(法性) 자체가 자아로서 체험되는 단계인 것이다.
화엄사 4사자삼층석탑에서 볼 수 있는 ‘아훔’의 신비로운 발성 표현은 같은 사찰 경내의 원통전 앞 사자석탑, 그리고 제천 사자빈신사지의 4사자삼층석탑에도 적용되어 있다. 이와 달리 한 쌍의 사자상을 조성할 경우에는 처음과 마지막의 두 단계만 표현하는 것이 원칙이다.
동래 범어사 대웅전 앞 계단의 사자상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는데,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입을 꾹 다문 모습이다. ‘아훔’의 발성 표현은 사자상뿐만 아니라 석굴암 금강역사상, 통도사 금강계단 석문(石門)의 신중상에도 적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밀교의 교의(敎義)와 깊은 관련이 있다. 정통 밀교사상은 실재(實在)와 현상, 처음과 끝을 자기의 한 몸에 융합하는 ‘즉신성불(卽身性佛)’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동남아의 불교 국가에서는 불전 앞에서 문지기 역할을 하고 있는 덩치가 크고 위엄 있는 사자상을 자주 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드문 경우지만 포항 보경사에서 불전을 지키는 사자상을 만나 볼 수가 있다. 대적광전 앞에 작고 귀여운 두 마리 사자가 배치되어 있는데, 전각 내에 비로자나불과 문수.보현보살이 모셔진 것을 감안하면 문수보살의 ‘탈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놓인 위치와 자세, 목에 달린 방울로 볼 때 불전 수호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벽사상이 분명하다. 옛 사람들은 금속성 소리가 귀신을 쫓는 영험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방울을 벽사용으로 사용했는데, 무당이 굿할 때 방울을 흔들거나 상여 기둥 끝에 방울을 매달아 소리 나게 하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사자는 석등에도 있다. 석등은 빛을 밝혀 진리를 찾는다는 불교적 사고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불전 앞이나 옥외의 일정한 곳에 설치돼 종교 의식의 예기(禮器)로 사용되어 왔다. 대표적인 석등 유적으로는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부도 앞 석등, 보은 법주사 쌍사자석등,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그리고 국립광주박물관 소장의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과 같은 것이 있다.
청룡사 보각국사부도 앞 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석등으로 하대석을 사자상으로 대신했으므로 사자석등으로 불린다. 법주사 쌍사자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석등으로, 널따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댄 채 뒷발로 아랫돌을 디디고,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합천 영암사지 석등은 아래받침돌에 연꽃모양이 조각되었고 그 위로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서 있다. 사자의 뒷발은 아래받침돌을 딛고 있으며, 앞발은 들어서 윗받침돌을 받들었다. 머리는 위로 향하고 갈퀴와 꼬리, 근육 등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은 원래 전라남도 광양시의 중흥산성 성 안의 절터에 있던 것이다.
이 석등은 간주석 부분이 쌍사자로 대치되어 있다. 두 마리 사자가 지붕과 화사석을 받들고 있는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뛰어난 조각기법과 우아한 조형미를 지닌 우리나라 석등의 대표적 걸작으로 평가된다. 석등의 간주석을 사자상으로 변형시킨 것은 사자가 용맹한 동물이므로 그 위력으로 진리의 빛을 수호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사찰 속에 존재하는 사자는 용(龍)처럼 신격을 가진 신중도 아니고, 연꽃처럼 불교적 상징형으로 대접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불국토와 부처님을 장엄하는 상징물이라는 점에서는 이들과 다를 것이 없다. 오히려 4사자탑의 사자와 같이 깊고 오묘한 교의(敎義)를 드러내는 상징형으로 존재하며 사찰 장식의 상징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하다.
사자상은 사자가 포효하며 일어날 때 다른 짐승 무리는 복종하고 사자 새끼는 용맹을 더하는 것처럼 부처님이 가진 그와 같은 권능과 위신력 자체를 상징하고 있을뿐더러, 사자빈신(獅子頻迅)의 기개로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외호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사자가 가진 일련의 이런 특징들은 불법수호의 기능만 강조되는 용이나 길상의 의미만 지닌 여타 동물들과 비교되는 점이라 하겠다.
*가릉빈가
부처님을 모신 수미단, 고승대덕의 부도 또는 와당 등에서 머리는 사람 형태이고 하반신은 날개, 발, 꼬리를 가진 불상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가릉빈가(迦陵頻伽)라고 하는 상상의 새다. 가릉빈가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년 전, 부처님이 왕사성 기원정사에서 사리불, 마하가섭 등 사부대중에게 설한 〈아미타경〉에 처음 등장한다.
부처님이 아미타 극락정토의 모습은 설하되, 그곳에는 흰 고니와 공작과 앵무와 사리조(舍利鳥)와 가릉빈가와 공명조(共命鳥, 한 몸뚱이에 두 개의 머리가 달린 새)와 같은 여러 새들이 밤낮으로 여섯 번에 걸쳐 아름답고 온화한 소리를 내는데, 이 새들은 모두 아미타불이 법음을 널리 펴기 위해 화현(化現)한 것이라 했다.
또한 그 국토의 중생들이 가릉빈가의 소리를 듣고 모두 부처님과 가르침을 생각하고, 스님들을 생각한다고 했다. 〈묘법연화경〉에는 부처님 음성을 가릉빈가 음성에 비유해 말했고, 후세 사람들은 가릉빈가를 미화하여 선조(仙鳥).호성조(好聲鳥).묘음조(妙音鳥).미음조(美音鳥).옥조(玉鳥)라고 불렀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의 사람들은 가릉빈가를 음악신 또는 음악의 창시자로 믿고 있는데, 인도 음악의 기원 전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도 고대 전설에 의하면, 설산(雪山, 히말라야산)에 신기한 새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무시카(Musikar)라고 불리는 악기를 연주하는데, 일곱 개 구멍 마다 각기 다른 소리가 나며, 계절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소리의 높낮이와 곡조의 조화가 미묘하여 환희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가릉빈가는 천년을 사는데, 수명을 다해 죽을 때가 되면 스스로 불을 피워 놓고 주위를 돌며 각종 악곡을 연주하며 열락의 춤을 춘다.
그러다 불 속에 뛰어 들어 타죽는다. 그러나 곧 따뜻한 재에서 한 개의 알이 생겨나 부화하여 과거의 환상적 생활을 계속하다가 또 불 속에 뛰어들어 타죽는다. 이렇게 하면서 생사의 순환을 계속한다. 환상적인 가릉빈가에 대한 전설은 대대로 전해져 지금도 인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가릉빈가가 갖추고 있는 인수조신(人首鳥身) 형태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인도 기원설, 그리스 기원설, 그리고 한대(漢代) 화상석에 보이는 우인(羽人. 날개가 있는 신선의 일종)기원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가릉빈가의 형태에 관한 한 다원발생적인 측면보다는 ‘동서문화의 교류와 융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서기 전 4세기 경, 알렉산더 대왕의 동정(東征) 길을 따라 인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파급된 그리스 문명은 현지 문명과 융합하여 제3의 문화를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간다라 미술이고 간다라 불상이다. ‘동서문화의 교류와 융합’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가릉빈가도 고대 인도신화 전설의 기초 위에, 그리스로마 신화 속의 천사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제3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 가릉빈가는 서역과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오늘날 사찰 곳곳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인수조신(人首鳥身) 형식의 문양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덕흥리고분, 안악1호분 등 고구려 고분벽화에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덕흥리 고분 천장에 그려져 있는 인수조신 형태의 새. 이 새 바로 옆에 ‘만세지상(萬歲之像)’이라고 쓴 명문이 보이는데, 이 내용은 인도 전설에서 가릉빈가가 천년을 산다고 한 것과 뜻을 같이 한다. 모양 또한 인수조신 형태로 묘사되어 있어 이 새가 가릉빈가임이 틀림없다. 같은 벽면에 신비로운 짐승들인 비어(飛魚),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새(청양), 불을 밟고 가는 불새도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새가 〈아미타경〉에 나오는 공명조(共命鳥)가 아닌가 생각되고, ‘양광지조리화이행(陽光之鳥履火而行. 빛의 새, 불을 밟고 가다)’이라는 명문이 붙어 있는 새는 불사조인 것으로 보인다. 천계(天界)의 상징인 천장에 이처럼 신조(神鳥)와 천인과 함께 가릉빈가, 공명조 등 극락정토에 사는 새들을 그린 것은 무덤을 극락정토로 조성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 경우에는 부도나 와당에서 가릉빈가문양을 많이 볼 수 있다. 문양이 아름다운 것으로는 경주 반월성 터를 비롯해서 황룡사지, 창림사지 보문사지, 안압지 등에서 발견된 와당이 있다. 부도의 경우에는 쌍봉사철감선사탑과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의 가릉빈가가 유명하다.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의 가릉빈가문을 살펴보면, 상단 괴임대 8면에 각각 날개를 펼친 가릉빈가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다리와 날개의 표현이 섬세하고, 자세는 유연하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의 경우는 상대석 위에 있는 8면의 안상(眼象)을 가진 탑신괴임대 면에 주악상과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양 날개를 활짝 펴고 서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금방 날아오를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도식적인 느낌이 강하나 그것이 오히려 부도의 분위기를 정숙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조선시대 가릉빈가 조각상으로 주목되는 것은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의 서운사(棲雲寺) 대웅전 가릉빈가상이다. 내부 모서리 두공에 봉황과 함께 가릉빈가를 장식해 놓았는데, 가릉빈가의 도상적 특징이 매우 사실적이다. 목각 가릉빈가상을 법당 내부의 모서리 두공에 장식한 예를 중국 복건성 천주(泉州)의 개원사 대웅보전에서도 볼 수 있으나 한반도 남쪽의 절에서는 찾을 수 없다.
불단에 장식된 가릉빈가로는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의 것이 유명하다. 수미단은 전면과 좌우 측면에 각양각색의 신비스러운 문양들로 가득 차 있는데, 쌍을 이룬 물고기를 제외하면 모두 상상의 동물들이다. 당초(唐草)를 입에 물고 있는 귀면, 모란꽃 사이를 나는 봉황, 박쥐 날개를 단 익룡, 인두어신(人頭魚身)의 물고기, 자라껍질을 등에 진 괴인 등 기이하고 초현실적인 동물이 어울려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 중에 가릉빈가가 포함되어 있는데, 띠매듭을 맨 천의를 입고 박대(博帶)를 어깨 위로 휘날리며 연꽃 봉오리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가릉빈가는 악곡연주, 춤, 노래로서 부처님을 공양하거나 설법 장소를 상서롭고 아름답게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가릉빈가의 출현은 곧 경사스러운 전조(前兆)의 의미로 해석됐다. 기원정사에서 부처님께 공양하는 날마다 가릉빈가가 내려와 춤을 출 때, 묘음천(妙音天)이 가릉빈무(迦陵頻舞)라 일컫는 춤곡을 연주했다고 한 경의 내용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성자가 출현하거나 성군이 덕치(德治)를 펼쳐 천하가 태평할 때 봉황이 나타난다고 하는 동양 고래의 상서(祥瑞) 관념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능엄경〉, 〈정법연경〉, 〈대지도론〉 등에 나오는 가릉빈가에 관한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러하다. 가릉빈가는 그 소리가 시방세계에 두루 미치는데, 그 소리가 지극히 신묘하여 하늘과 사람과 음악신인 긴나라까지도 흉내 낼 수 없으며,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염증을 느끼지 않는다. 가릉빈가는 알 속에서 나오기 전에도 울음소리를 내는데, 그 울음소리는 여타 다른 새들의 어느 것보다 미묘하고 뛰어나다. 부처님의 음성은 마치 대범천왕의 것과 같고, 가릉빈가의 울음소리와 같이 아름답고 곱기 때문에 범음상이라고 한다.
가릉빈가의 불교적 의미는 형태가 아니라 이처럼 소리에 집중되어 있다.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이 청정 미묘한 범음으로 무상의 정법을 연출하니 듣는 사람들이 기뻐하여 맑고 오묘한 도리를 얻는다고 했다. 범음이란 대범천왕이 내는 음성으로, 음이 정직하고 조화롭고 우아하며, 음이 맑고 투철하고 깊고 풍족하며, 음이 두루 미처 멀리 들린다. 범음을 내는 가릉빈가는 부처님의 또 다른 화현(化現)에 다름 아니다.
사찰 도처에서 우리는 토끼와 거북이가 단독으로, 혹은 함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승주 선암사 원통전에는 방아 찧는 두 마리 토끼 가 있고, 김제 금산사 보제루에는 누운 자세로 건물 부재를 받치고 있는 한 쌍의 토끼가 있다.
남원 선원사 칠성각, 상주 남장사 극락보전, 양산 통도사 명부전에도 토끼와 거북이 형상을 그린 그림이 있으며, 여천 흥국사 대웅전 축대 위에는 돌을 깎아 만든 토끼와 거북이 상이 있다. 그리고 울진 불영사 대웅보전 석축 아래에는 덩치가 큰 두 마리의 거북이 상이 있다.
선암사, 금산사의 것은 토끼만 나타나 있는 경우이고 선원사, 남장사, 통도사, 흥국사의 것은 토끼와 거북이가 함께 등장한 경우며, 불영사의 것은 거북이만 나타나 있는 사례다. 선암사 원통전 출입문 궁창에 장식된 토끼상은 조각 솜씨가 뛰어나거나 아름답지는 않지만 지닌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단순한 토끼 문양이 아니라 토끼로써 달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예를 서울 창덕궁 대조전 뒷뜰의 굴뚝에서 찾을 수 있는데, 토끼로써 달을 표현하는 상징적 수법은 전통시대 장식 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이는 전설이나 민담을 통해 형성된 달에 대한 일반적 관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불교에서 보리심을 심월(心月)이라 하거나 만월에 비유하는 것은 밝고 깨끗하며, 광명을 천지에 두루 비추어도 분별됨이 없는 것이 보름달과 같기 때문이다. 관음보살의 화현(化現) 중에 달과 관련된 이름을 가진 보살로는 만월보살, 수월보살, 월광보살 등이 있는데, 보살에 달과 관련된 이름을 붙인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보름달의 기하학적 속성은 원이다. 둥근 원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점의 연속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원은 영원성과 상통한다. 또한 원은 크기의 대소를 불문하고 자체로써 완전성을 확보하고 있기에 불교의 원만(圓滿).원통(圓通).원공(圓空) 등의 개념과 통한다. 관음보살을 원통교주라고 하는 것은 관음보살이 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圓融通)을 갖추고 중생 고뇌를 소멸시켜 주기 때문이다.
관음보살의 원만.원통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이상적 상징형은 무어라 해도 보름달이다. 실제로 동래 범어사 관음전 벽면에는 커다란 보름달이 그려져 있다. 선암사 원통전 출입문의 토끼는 그냥 토끼가 아니라 보름달이다. 그것은 원통전의 주인인 원통교주가 보문시현(普門示現)을 통해 나타난 또 하나의 관음보살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들에게 친숙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혹은 〈별주부전〉은 인도의 불전설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불전설화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본생담을 말하는 것으로, 원왕본생(猿王本生), 악본생(鰐本生), 원본생(猿本生)의 세 가지가 있다. 이야기는 옛날 인도에서 교훈적인 우화로 전해 오다 불교 경전에 수용되면서 종교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설화에 등장하는 동물은 원숭이와 악어인데, 물에 사는 악어 아내가 원숭이 간을 먹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본생담에 삽입된 고대 인도설화가 불교전파와 함께 중국에 들어와 한문으로 번역될 때 악어와 원숭이가 거북이와 원숭이, 또는 용과 원숭이로 변했다. 그러나 설화가 지니는 불교적 의미는 같은 것이어서 설화 속의 원숭이는 부처님의 전신(前身)이며, 악어는 악인(惡人)인 제바달다(提婆達多, 부처님과 같은 시대의 이단자)로, 악어가 원숭이 간을 탐내는 것처럼 제바달다가 부처님을 해치려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 각색된 본생담이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주인공이 다시 토끼와 거북이로 변했다. 이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이 〈삼국사기〉 열전(列傳) 김유신전에 삽입된 ‘귀토설화(龜兎說話)’인데, 내용을 보면 이야기 주인공의 변화를 알 수 있다.
‘귀토설화’의 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통도사 명부전 내벽에 보인다. 토끼가 거북이 등에 올라타고 용궁을 향해 가는 장면을 그렸는데, 일행 앞에서 또 다른 거북이가 길을 안내하는 모습이 보이고, 날아갈 듯한 기와지붕 옆에 써놓은 ‘수궁(水宮)’이라는 글자가 토끼 일행의 목적지가 용궁임을 알려 준다. 남장사 극락전의 그림은 토끼와 거북이 일행이 육지를 막 떠나는 장면을 그렸다. 일행을 떠나보내는 또 한 마리의 토끼 모습이 이채롭다.
여천 흥국사 대웅전 축대에도 토끼, 거북이 조각이 있으며, 남원 선원사 칠성각에도 거북이와 토끼를 조각한 목조 장식물이 있다. 이와 달리 거북이 혼자 등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해남 미황사 대웅전 앞쪽 주춧돌, 선암사 불조전 천장, 울진 불영사 대웅전 석축 밑, 창녕 불곡사 일주문 위, 정읍 내장사 대웅전 현판 양쪽 등 여러 곳에서 그와 같은 예를 찾을 수 있다.
‘귀토설화’에서 육지를 떠난 토끼와 거북이가 향해 가는 목적지는 용궁(龍宮)이다. 용궁은 용왕의 신령스러운 능력으로 만든 곳으로서 불교에서는 대해(大海) 밑에 있는 또 하나의 불국정토로 관념화 되는 곳이기 하다. 불자들은 현세에 불법이 유행하지 않게 될 때에는 용왕이 용궁에서 경전을 수호한다고 믿고 있다. 용궁과 관련해 〈불설해용왕경(佛說海龍王經)〉 ‘청불품(請佛品)’에 이렇게 적혀 있다.
해용왕이 영취산에 나아가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신심이 환희하여 용궁에 오셔서 공양을 받으시도록 청하니 부처님이 허락했다. 용왕은 곧바로 대해에 들어가 조화를 부려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을 짓고 무량보주로 갖가지 장식을 하니 장엄이 비길 데가 없었다. 해변으로부터 바다 밑에 이르기까지 통로에 삼도보계(三道寶階)를 만드니 도리천으로부터 염부제에 내려올 적과 같았고, 부처님이 모든 비구.보살들과 함께 보배 계단을 밟고 용궁에 들어가 용왕을 위하여 대설법을 베풀었다.
용수(龍樹)보살 전설에도 용궁이 등장한다. 대승불교를 일으킨 인도의 용수보살이 설산(히말라야 산)에서 어떤 늙은 비구의 인도로 용궁에 들어가 많은 경전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 용수보살은 한없이 많은 〈화엄경〉 범본(梵本) 가운데서 하본(下本) 화엄경을 지상으로 가져왔고, 그 때 가져온 〈화엄경〉이 오늘날의 〈화엄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불자들에게 용궁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주었으며, 〈화엄경〉의 소장처가 용궁이 있는 바다와 관련이 있다는 관념도 심어 주었다. 이와 연결해 볼 때, 선암사 대웅전 처마의 착고판(부연과 부연 사이를 판자로 막은 부분)마다 묵서 ‘해(海)’자를 쓰고, 대웅전 옆 요사채의 판벽에 ‘해(海)’자와 ‘수(水)’자를 투각한 것은 대웅전 일대를 대해의 불국정토, 즉 용궁으로 상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추측되며, 양산 통도사에서 경전을 보관하는 전각 이름을 해장보각(海藏寶閣)이라 한 것도 불경의 보관처가 해저 용궁이라고 보는 관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회전식 불경 보관대인 윤장대로 유명한 용문사가 있는 곳이 용궁리(龍宮里)라는 것도 우연의 일치로 보아 넘기엔 시사하는 바가 너무 크다.
불자들의 관념 속에는 사바세계에서 피안(彼岸)의 정토로 건너 갈 때 타고 가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는 상상의 배가 있다. 관념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것이 반야용선도이며,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법당 앞 기둥과 추녀 밑의 용두이다. 서방 극락정토로 가는 탈 것이 반야용선이라면 동방 해중 용궁으로 가는 탈 것은 거북이가 될 수 있다.
울진 불영사 대웅보전 축대 밑에 돌로 만든 커다란 거북이상이 있는데, 계단 양쪽에 각 한 마리씩 두 마리가 마치 대웅보전을 등에 지고 어디론가를 향해 가는 듯이 보인다. 여천 흥국사 대웅전 축대 위의 거북이는 옆에 있는 토끼와 함께 대웅전 건물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위치와 자세로 볼 때 이 거북이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법당의 불자들을 인도하여 용궁이라는 이상세계로 가는 ‘반야귀선(般若龜船)’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한다.
*토끼와 거북이
거북이의 자세와 관련해 비석의 귀부(龜趺)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귀부는 경주 신라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처럼 완전한 거북이 형태로 된 것이 있는가 하면, 여주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의 귀부처럼 용머리에 거북이 몸의 형태로 된 것도 있다. 이들 귀부를 유심히 보면 앞을 향해 나아가는 자세를 취한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특히 청원 봉선홍경사비갈 귀부의 경우, 고개를 한 쪽으로 크게 돌린 자세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 틀림이 없다. 쌍봉사철감선사탑비 귀부 역시 앞발을 휘저으며 물 속을 헤엄쳐 나아가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귀부가 향해 가는 곳은 아마도 이상세계일 것이며, 그것은 동방 해중의 불국정토와 같은 곳이리라.
사찰 장식 미술 속의 토끼와 거북이는 가깝게는 ‘귀토설화’의 주인공이지만 설화의 원천을 따진다면 부처님의 본생담과 관련있는 동물이다. 바로 이점이 토끼와 거북이가 사찰 장식 미술의 소재로 수용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사찰 장식 미술의 소재로 수용된 토끼와 거북이는 때로 각기 독자적인 의미를 가진 상징물로 존재하기도 한다. 토끼는 달의 상징형으로, 거북이는 극락정토를 지상의 공간에 구현하는 상징형으로, 불자들을 대해의 용궁으로 인도하는 탈 것의 상징으로 거북이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호랑이
사찰의 불전 장식화 가운데 특별히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호랑이그림이다. 민간에서 많이 그려지는 호랑이그림이 사찰 장식 그림으로 활용되는 것도 흥미롭거니와 표현 방법과 내용이 민화와 다르지 않다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일반 민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까치와 호랑이를 그린 것, 호랑이 한 마리만 그린 그림,담배 피우는 호랑이를 그린 것,산신의 시자(侍者)로 앉아 있는호랑이를 그린 그림 등 내용도 다양하다.
어떤 사찰에는 부처님이 전생에 보살이었을 때 굶주려 죽게 된 호랑이 가족을 살리기 위해 몸을 보시했다는 본생담 내용이나 희방사 오누이탑 전설 등 호랑이에 얽힌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도 있다. 건물 장식용 호랑이 그림 중에서 볼만한 것은 양산 통도사 해장보각의 까치호랑이그림이다. 민화 까치호랑이그림의 전형(典型)을 그대로 따르는 이 그림은 까치가 소나무 가지에 앉아 호랑이에게 무언가 지저귀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보통의 까치호랑이그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소나무 가지에 앉은 까치가 호랑이 얼굴보다 낮은 위치에 그려져 있다는 것과 까치 두 마리가 나란히 앉아 있지 않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가로로 길게 생긴 공포(包) 벽에 그려야 했기 때문에 생겨난 불가피한 현상으로 보인다.
한문으로 호작도(虎鵲圖)라 불리는 까치호랑이그림은 민간에서 세화(歲畵, 새해맞이 그림)로 인기가 높았던 그림의 하나로 까치, 호랑이, 그리고 소나무를 기본 요소로 하고 있다. 때로 바위, 불로초, 난초 등이 곁들여 그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그림의 상징적 의미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까치가 한 마리일 경우도 있고 두 마리일 때도 있는데, 이것은 한쌍주의를 고집하고 있는 화조화의 경우와 다른 점이다. 민화 화조화에서 볼 수 있는 한 쌍의 새는 음양의 조화나 남녀 화합을 상징한다. 그러나 호작도의 까치는 그런 것과 상관이 없이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하는 전통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기쁨의 상징형으로 존재한다.
호작도의 화의(畵意)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몇 가지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서낭신의 사자(使者)인 까치가 호랑이에게 신탁(神託)을 전하는 내용이라는 주장도 있고, 약자의 상징인 까치가 강자의 상징인 호랑이를 조롱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런데 민화 소재의 경우, 발음의 유사성과 관련하여 특정한 의미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예컨대 징그러운 박쥐가 행복의 상징이 된 것은 편복(, 박쥐의 한자 말)의 ‘복()’이 ‘복(福)’과 발음이 같기 때문이고, 원숭이가 관계(官界) 등용을 상징하게 된 것은 ‘후()’가 제후(諸侯)의 ‘후(侯)’의 발음과 같기 때문이다.
호작도의 호랑이는 ‘보(報)’를 의미한다. 호작도의 전신(前身)이 까치표범그림인데, 표범은 ‘표(豹)’와 ‘보(報)’의 중국식 발음이 서로 같다는 이유로 ‘보답한다’는 의미를 얻은 것이다. 결국 까치호랑이그림은 세시를 맞이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을 호랑이와 까치를 매개체로 표현한 그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로 하여금 만면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호랑이 그림이 수원 팔달사 용화전 외벽에 있다. 이 벽화를 보는 사람은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과 ‘까마득해 종잡을 수 없는 옛날’을 생각해 낼 것이다. 팔달사 스님 말로는 약 100여년 전에 그려졌다고 하는데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은 편이다. ‘호랑이 담배피우는 그림’이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토끼가 호랑이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호랑이는 나름대로 위엄을 갖춘 자세를 취한 듯하나 얼굴 표정에 배어나는 어수룩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고, 담뱃불을 붙여주는 토끼는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밝고 요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혹자는 이 그림을 힘 있는 지배계급과 힘없는 피지배계급사이에 일어나는 갈등관계를 풍자한 그림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옛날 민화 화가들과 일반 서민들의 정서를 잘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단결일 뿐이다.
정통회화이거나 민화이거나 간에 한국 전통회화사에서 그림을 사회 풍자의 도구로 활용한 예는 없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 풍속화조차도 강자와 약자 간의 갈등이나 투쟁 같은 것을 풍자해서 그린 경우가 없었다.
우리의 옛 서민들은 서구의 사실주의 회화처럼 그림을 사회개혁이나 계몽 수단으로 활용할 줄도 몰랐고, 그런 일을 해낼 만큼 영악하거나 투쟁적이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던 아름다운 옛 이야기의 한 장면을 그려 집 안팎을 장식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절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그림을 말할 때 산신도를 빼놓을 수 없다. 산신도는 산신각에 단독으로 봉안되거나 칠성도, 독성도와 함께 삼성각(三聖閣)에 모셔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산신도는 선풍도골(仙風道骨) 풍의 노인이 호랑이를 옆에 거느리고 소나무 아래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호랑이의 표정에서 동물 왕으로서의 권위나 용맹성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산신은 원래 불교의 신중이 아닌 우리나라 고유의 토착신이며, 당초의 산신 신앙은 호랑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예(濊)조에 우리나라 풍습에 관해 “그 풍속은 산천을 존중한다. 산천에는 각기 부계(部界)가 있어서 함부로 서로 간섭할 수 없었다”는 내용과 함께 “호랑이에게 제사 드려서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고 적혀있다. 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원래 우리나라 산신신앙의 대상이 신격(神格)을 가진 호랑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산신도를 보면 호랑이가 ‘산신님’의 시종(侍從)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이런 현상은 자연신인 호랑이의 신격(神格)을 ‘산신님’으로 인격화하고, 주된 신앙의 대상을 ‘산신님’으로 삼게 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자연신인 호랑이, 호랑이의 신격이 의인화 된 산신, 그리고 우주목으로서의 소나무, 이 세 가지 기본 요소들로 구성된 산신도는 한국 전래의 산신신앙 체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호랑이를 단독으로 그린 그림은 까치호랑이그림이나 설화도에 비해 흔한 편이다. 양산 통도사 응진전.명부전, 부산 범어사 대웅전, 파주 보광사 대웅전, 울진 불영사 대웅보전의 호랑이그림을 비롯해서 많은 사찰 전각의 벽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배경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으나 까치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호작도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호랑이가 정면을 응시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은 벽사(邪)와 수호(守護)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최근에 새로 지은 절에서 대나무를 배경으로 한 호랑이 그림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벽사 기능을 가진 그림에 속한다.
파주 보광사 대웅전 후면 외벽의 호랑이 그림은 판벽에 그려져 있는데, 배경은 완전히 사라져버렸으나 흰 바탕에 검은 얼룩무늬 호랑이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다. 소나무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기 어려우나 서있는 자세는 범어사의 것과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보광사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영조 임금이 그의 모후인 숙빈 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재건한 것으로, 대응보전은 만세루, 관음전과 함께 그 시기에 지어졌다.
왕실의 원찰답게 건물 장식에 길상문양과 민화적인 요소가 풍부한데, 이 호랑이그림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이다. 건물 뒤편 벽에 그려져 있어서 일부러 찾아가 보지 않으면 그림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이런 후미진 곳에 호랑이그림을 그려 놓은 것은 당초의 목적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벽사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불전 장식 호랑이그림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세화(歲畵)의 성격을 가진 것이 있고, 민담이나 전설 속의 환상을 표현한 것이 있다. 또한 호랑이의 용맹성을 빌리는 벽사용 그림이 있고, 신앙의 대상이 된 호랑이그림이 있다.
이들 호랑이그림들은 불교적이라기보다는 서민적인 욕망과 정서를 담고 있으며, 표현 형식 또한 민화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주로 민간인들에 의해 요구되고 향유되던 호랑이그림이 이처럼 불전 장식용 그림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불교의 너그러운 포용력과 자신감 덕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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